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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자의 캐나다의 이야기

홍성자의 캐나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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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다수의 수필집 출간

helensj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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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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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5
죽도록 불어보고 싶었던 색소폰

색소폰! 

죽더라도 불어보고 죽으리라! 는 소녀시절의 꿈이 환갑이 넘어서야 이루어졌다. 

모든 색소폰 연주자가 꼭 가져야 할 색소폰 액세서리 TOP 10 – Soundbrenner

 어쩌다 캐나다로 이민 와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속에 파묻혀 사는 와중에 세 아이들은 다 결혼하여 내 곁을 떠나갔다. 모국어도 없고 친구도 없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국생활, 나도 그 한 사람으로서 남는 것은 허전함과 일상의 외로움뿐이요, 인생 참 허무하다더니 남의 말이 아니었다. 

 

 새치름하던 소녀시절, 열 서너 살쯤 되었을까, 오빠가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 들어가면서 악기점에 따라가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본 일이 있었다. 그 색소폰이라는 악기는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언젠가 또 대중을 휩쓴 이봉조 씨의‘밤안개’색소폰소리를 들었다. 

 깊은 울림으로 온 몸을 감싸는 그 소리에 끌리면서 나도 불어볼 수 있을까? 언젠간 나도 불어보리라, 내가 불어도 가슴을 적시는 저런 음률이 흘러나올까. 죽더라도 불어보고 죽으리라. 그런 생각을 곰곰이 했었다. 

 소녀의 아련한 꿈은 이루기 어렵다고 들어왔고, 그 말 그대로 애들의 엄마가 되고, 생업에 매달리다 보니 철부지 소녀의 꿈은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캐나다로 이민 온지 20 여년, 그 후 언제였더라. 남편과 함께 토론토의 블루어 거리에“롱 앤 맥쿠에이드”악기점 앞을 지나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색소폰을 보자 거기에 시선이 딱 멎으면서 심장의 심한 고동을 느꼈다. 

 어머나, 저 색소폰! 한참동안 넋을 잃고 두 손을 쇼윈도에 대고 색소폰을 바라 본 직후 다리가 움직여지질 않았다. 남편한테 

“나 걸음이 안 걸어져요, 죽더라도 불어보고 싶은 저 색소폰을 한번 만져 라도 보고 싶어요.”하니, 나를 부추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살아오는 동안 색소폰을 불어보고 싶은 것이 내 꿈이라고 여러 번 했던 말을 기억 했던지 색소폰을 사자고 했다. 

악기점 케네디언 쎄일스 맨은 

“색소폰을 사시게요? 지금까지 색소폰을 부셨어도 이제는 색소폰 부는 것을 그만 두셔야 할 나이 이신 것 같은데요.”

“색소폰 살 거예요.”나는 강하게 말했다.

그는 마지못해 하며 내 체격에 알맞는 싸이즈의 앨토 색소폰을 골라주었다. 

 

 그 날 밤 색소폰을 안고 가슴이 설레어 잠을 설쳤다. 남편은 내가 색소폰 때문에 큰 병이 날까봐 겁부터 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도 저렇게 죽도록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부러워했다. 

 

 세월의 풍화작용에 묻혀 버렸던 꿈이 깨어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평생 불어보고 싶었던 색소폰! 

죽도록 불어보고 싶은 색소폰을 불어 본다는 것은 필사적인 염원이었다. 도전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내 사전에는 없다고 속으로 부르짖으며, 남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는가, 내 소원을 풀어 주는 남편이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겠다고 오른 손을 드는데 눈이 번쩍 뜨이고 용기가 치솟았다. 

 

 불어보자! 색소폰!  

얼마 후‘에버그린 색소폰’동호회 회원들의 콘서트가 토론토의 한국일보 도산 홀에서 있다는 광고를 신문에서 보았다. 열일을 제쳐두고 단숨에 제일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연주회는 정말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도 색소폰을 배워서 연습을 하면 저렇게 구성진 노래가 나올 수 있을까? 가슴만 두근거렸다. 

 

 다음 날 색소폰 동호회의 문을 두드렸다. 

인터뷰를 하는데 먼저 묻는 말이 치아(이빨)가 다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가 하나라도 빠져서 없으면 바람이 새서 힘을 못 받아 색소폰 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빨은 다 있습니다.”

“악보를 보실 줄 아십니까?”

“네”

 동호회회원이 되면서 아래 입술은 터져 부풀어 올랐고, 색소폰의 무게를 통째로 감당해야 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검게 먹이 들어가고, 횡경막 내려 누르기 운동에 뜨거운 땀을 흘리는 호된 연습과정을 거치면서, 그냥 그냥 간단한 동요와 쉬운 찬송가를 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뒤이어 한국 가요명곡집의 웬만한 노래는 그런대로 불수 있게 되었으니, 어느새 색소폰 부는 즐거움에 취해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타국살이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날들의 고뇌가 스며드는 이 소리는 나에게 천상의 소리였다.

 이민 와서 그 동안 남모르게 서럽고 외로워 몸부림치며 울었던 날이 그 얼마였나, 힘들고 어려웠던 삶속에 이제 색소폰은 큰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며 남을 위로해주는 정도까지 왔으니 그저 가슴이 뿌듯하고 감사할 뿐이다. 

 

 내 인생에 색소폰은 아주 특별한 취미로 자리를 차지하고, 내 몸의 한 부분인양 함께 살아가게 되었으니, 타국살이에 답답했던 탈출구로 내 꽃 중년에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릴 때 아스라이 멀어져 갔던 꿈을 나이에 상관없이 이루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가끔 보게 된다.

노년기가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이제는 100세 시대라 하지 않는가. 만학도 들의 즐거운 그 배를 나도 탔다고 할까? 보람 있는 취미를 몇 가지 갖고 있다면 노후의 삶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을 쌓으며 좋은 취미활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봉사 활동이지 않는가. 

색소폰 부는 일이 보람이며 자부심도 생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아름다운 표현은 아름다운 삶에서 우러나오고, 여유로운 표현은 여유로운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토론토에 있는 한인 양노원에 * * 교회 봉사 팀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3 년째 색소폰 연주 위문공연을 가고 있다, 

 

 꿈을 이루어 불어보는 색소폰!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고향무정 같은 가요를 색소폰으로 연주 하노라면 아무래도 이민자의 애환이 우러나올 터이다. 또한 누구라도 마음에 새겨진 것이 있다면 고향이라는 말과 어머니라는 말일 것이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저산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 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 불후의 가요명곡이라는“꿈에 본 내 고향”을 색소폰으로 불라 치면, 내가 뛰어 놀던 고향 산천의 흙냄새가 나는 듯, 쑥이며 냉이를 뜯던 그때 친구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냇가에 동네 엄마들의 빨래 방망이 메아리치는 소리에 하루해가 저무는 고향이 그리워. 먼저 내 가슴이 아려 온다. 

 

 양로원에 계신 어르신들은 이제 몸은 늙고 아파서,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탈수 없어 고향에 가실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어찌 헤아릴까. 

 한인 노인들을 위하여 흘러간 가요를 색소폰으로 선사해 드리면, 어느 어머님은 내가 한 달에 한번 오는 일을 기억 못하시는지, 언제 오느냐고 옷자락을 붙잡으며 내일 또 오라고 하신다. 그 다음 달에 가보면 옷자락을 붙잡던 어머님이 보이질 않아서 일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저 세상으로 가셨다고 할 때 내 다리는 힘없이 주저앉아진다. 

 

 “어머님! 어떤 노래를 듣고 싶으세요?” 하면

“너는 내 남자”라고 하신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라며 90세가 다 되어가는 어머님께서도 그때 그 젊은 시절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구나, 어머나, 그렇지, 그런데 요즈음 나온 노래를 어떻게 아실까? 

 양로원에서도 어르신들을 위하여 무료한 시간들을 즐겁게 보내시라고 늘 한국TV나 가요무대 등을 보여드리고, 노래방 기계를 사용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 보다 오히려 노래를 더 많이 아시기도 한단다. 

 

어느 아버님은

“내 나이가 어때서”를 노래할 테니 나보고는 색소폰으로 연주하라 하신다. 몸은 100세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마음만은 청춘임을 말릴 수 없다. 

  

 양로원에 와서 함께 봉사하는 젊은 분들이 부러워하며, 세상에 그 나이에 색소폰까지 분다 며 손을 붙잡고 놓지를 않는다. 젊었을 때는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70을 눈앞에 보는 이 나이에 그 모습이 남아 있겠나, 그래도 예쁘다 하면 정말인가? 하며 그 말을 믿고 싶으니 나이 들어도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여자의 본능일까.

 

 흘러간 팝송 베싸메 무쵸, 밤하늘의 부르스, 적과 흑의 부르스, 대니 보이 등 몇 곡을 연습하여 외국인들 모임에도 나가서 불면, 앵콜! 앵콜! 환호성에 천정이 들썩 들썩, 아리랑을 불 때면 코리아! 코리아! 응원의 박수소리에 나도 한국의 작은 외교관이며, 이 모습이 바로 1등 애국자라는 생각에 어깨가 위로 으쓱 위로 쭉 펴진다. 

 

 이 나이에 대중 앞에서 색소폰 연주를 한다는 것이 스타 탄생의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이 정도로 불 수 있었나 하며 나 자신 놀라기도 한다. 비록 나이든 한국여자 아마추어지만, 내 마음속 희로애락을 오색의 영롱한 무지개로 한참 피워내고 있는 중이다. 

 

 색소폰은 그 소리가 사람의 음성과 가장 비슷해서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고 한다. 모양도 도발적이고, 그 음색은 매혹적이며 화려하고 황홀하기까지 하다. 

 색소폰은 불면 불 수록 그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은, 웅장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소리, 때로는 강한 소리, 또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 애절한 소리, 독특한 콧소리까지도 낼 수 있는 악기이다. 

 또한 깊은 울림과 묘한 떨림의 감성적인 소리 등 갖가지 소리를 낼 수 있고, 소리에 대한 매력뿐만 아니라 모양에 대한 매력, 연주에 대한 매력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색소폰을 불면서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상식은, 색소폰이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금관악기 인줄 알았는데, 목관 악기라는 것이다. 

금관 악기냐? 목관악기냐? 구분하는 것은 무엇으로 소리를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색소폰의 소리를 내는 것은 입에 무는 마우스에 대나무 조각 즉, 리드(Reed)를 끼워서 대나무조각의 떨림으로 소리를 내게 되니, 색소폰은 목관악기라는 것이다. 

 그 작은 대나무 조각 하나 때문에. 목관악기라고 .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속담에 밤새 울고 나서 아침에 누가 죽었느냐고 묻는다더니 참 이런 아이러니한 일도 있다. 

 

 옥타브 키 하나로 음의 높고 낮음을 마음껏 조절할 수 있는 색소폰을 즐기는 정도에 까지 오다 보니 신비하고 신기하여 더욱 애착이 간다. 

 세 번씩이나 업 그레이드 해서 바꾼 내가 사랑하는 쎌마 앨토 색소폰은 고음으로 길게 불 때 그 매력은 극에 달한다. 

 특히 내가 제일 즐겨 부는 연주곡으로 “적과 흑의 부르스”를 불 때다. 

 

 토론토의 한인행사로 노인회 행사, 캐나다 문인협회에서 크고 작은 행사, 국제펜클럽의 행사 때, 주변사람들의 출판기념회 등, 연주 요청이 들어 올 때는 즐거운 비명이다. 

 요즈음 신선하게 뜨는 단어‘재능기부’라는 말이 피부에 닿아 자존감이 수직 상승중이다. 

 

 색소폰 연주! 

한편으론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다. 출동 장비가 많고 무겁다는 말이다. 색소폰 하나만 달랑 들고 가는 프로가 아니라는 말로도 풀이 되겠다. 

 색소폰의 부품들을 다 점검하여 꼼꼼히 챙겨야 한다.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리드도 두세 개 더 준비하여야 하고 한 가지라도 빠지면 연주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출동 때는 혹시 빠진 것이 없나 많이 긴장이 되었었지만, 익숙해지니 장비도 척척 잘 챙겨 가지고 간다. 

 원시안경, 색소폰 반주기가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 (노트북), 컴퓨터를 올려놓는 튼튼한 보면대, 무거운 앰플리 화이어, 악기 걸대, 긴 전기 연결선, 색소폰에 붙이는 작은 마이크 등 .  

 장비들도 성능이 더 좋은 걸로 여러 번 바꾸었지만, 새로운 제품들이 계속 나오니까 또 바꾸고 싶은 욕심은 한이 없다. 

 

 초로의 한국여인이 뱃장도 두둑하게 토론토의 유명 악기점을 들락날락 거리며 살다시피 하다 보니 악기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 중 레바논에서 온 백인 윌리암은 전에 한국에도 1년 동안 영어 선생으로 다녀왔다 하며,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김치 너무 맛있어요, 등을 말한다. 김치를 굉장히 좋아 한다고 해서 갖다 주면, 색소폰 부품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정보도 주고 요령도 일러 준다. 

 그럴 때마다 색소폰은 물론, 다른 악기들에 대하여도 날로 발전되는 나를 발견하며 이런 세계도 있었나? 스스로 감탄도 한다.  

 

 색소폰! 

죽더라도 불어보고 죽으리라!  

 꿈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족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확실한 모본이 되었다.

 

 색소폰은 입으로만 부는 것이 아니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온 몸으로 분다 는 사실이다.

 색소폰을 부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잊고 나이를 잊는다. 

 

 색소폰은 아무나 부나, 집념과 열정으로 미쳐야 분다. 

 미치면 나처럼 용감해 지는 것이다. 

 

 스스로의 환희에 빠지면서 온통 색소폰이 되는 우주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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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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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5
빨간 신호등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빨간 신호등

간도 크지 어쩌자고 빨간 신호등에 시작하여 번연히 운전을 하고 가는가?

빨간 불이 켜져 있는데 무슨 생각에 빠져 교통신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왔는가?

 

어느새 뒤에서는 경찰 페트롤 카가 왱왱거려서 차안의 백미러로 보니, 빨강 파랑불이 빠르게 돌아가며 내 차를 세우라고 난리다. 언뜻 보니 또 한 대의 같은 차가 왱왱거리더니 내 차 운전석 쪽에 즉시 달라붙는다. 나를 꼼짝 못하게 완전 포위한다.

오 마이 갓! 완벽한 신호위반 임이 분명하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주 예수! 주 예수! 만을 빠른 말로 거듭 불렀다. 오른 쪽 길가로 서서히 차를 세우고 앞의 양쪽 차 유리문을 내렸다. 고개를 앞으로 끄덕끄덕하며 살며시 웃었다. 빨간불에 갔다고 인정하는 뜻이다.

 

두 명의 백인 젊은 무장경찰관이 내 얼굴에 바짝 다가오니 혼이 빠질 것 같이 으스스했다. 내가 먼저

“아이 메이크 미스테이크, 아이 메이크 미스테이크, 암 쏘리, 암 쏘리” 하면서 두 손을 앞으로 순간 모았다가, 지갑을 꺼내어 운전면허증을 주려고 하니, 경찰관은 손바닥을 흔들며 노 노 노 노 하면서 조심해서 운전하라 한다.

 

“아 유 오케이? 아 유 오케이?” 묻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내 차안을 순간 훑어보는 것 같았다.

“아이 앰 오케이, 아이 앰 오케이” 하면서 밝게 웃었다.

핸드폰은 핸드백 속에 있었으니 그 또한 하나님의 가호하심이었다.

어텐션! 어텐션! 주의를 주며 친절하게 잘 가시라고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경찰관의 두 손이 앞을 향한다, 그것도 두 명이 약속이나 한 듯이.

 

오마이 갓! 땡큐! 쏘 마치! 할렐루야 아멘! 지저스! 를 경찰관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내가 먼저 악세레다를 밟고 유유히 앞으로 간다. 약간 무서움을 느꼈지만 백미러로 뒤를 보니 경찰관 두 명은 내 차의 뒷모습을 보고 서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오른손을 흔들었다.

 

순간을 지나고 보니, 때 묻지 않은 젊은 백인 미남경찰관들의 그 선한 얼굴들이 클로즈업된다. 언젠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되면 식사비를 내어줄 것이다. 그 뿐인가 커피도 사주고 그들이 하는 일에 감사하며 위로하고 용기도 줄 것이다.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지만, 한편으로는 내 잘못을 즉시 인정하고 처벌을 내려라, 달게 받겠다 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경찰관들이 감동을 받았나? 아니면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이었나?

 

운전한지 40여년이 넘었고, 눈만 뜨면 운전하고 살아야 하는 캐나다에서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차들이 앞뒤 양 옆에서 속력을 내어 들이치면 얼마나 큰 사고가 났을 것인가? 아찔하다.

 

나중에 아는 분한테 이야기를 하니 빨간불에 갔다면 벌점 4-5점에 벌금 4-5백 불 정도는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벌점이나 벌금보다도 일단 골치 아픈 일이 아닌가. 너그러움과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캐나다의 경찰관들이 얼마나 멋지고 신사적인가?

 

오래전부터 좌우명으로 삼고 사는 말이 있다.

잘못을 했으면 즉시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무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도 대부분 문제가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안전벨트가 내 생명을 구하고, 정직하지 않아도 많은 경우 별 탈이 없는 것 같지만, 정직은 결정적일 때 나의 운명을 바꾼다. 또한 정직은 최상의 재산이라는 말도 있다.

 

정직? 나는 과연 정직한가? 정말로 정직하게 살아왔나? 정직이란 말이 나를 또 무겁게 한다. 양심은 정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언제가 되어야 정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순간 나오는 말과 행동에서 어떠함을 볼 수 있겠다. 오늘의 이 일은 정말 정직했음으로 복을 받은 것 같다. 정직이 축복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면서 순간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천국과 지옥을 단 몇 분 만에 맛본 셈이다. 나이 들면서 정신 줄을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는 경고다.

 

빨간 신호등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가지 말라! 일단 정지하라! 빨간 신호를 무시하면 끔찍한 피를 흘릴 것임을 다시 한 번 나를 일깨워준다.

hongsj
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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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6
사소한 '걸치는 것' 하나의 중요함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8월의 끝자락이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서면 문득 지난 계절의 호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7월, 감기라는 작은 그림자가 내 몸에 드리운 지 두 주가 넘었을 때의 일이다. 처음엔 그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여름 감기는 내 몸 한편에 조용히 눌러앉아,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쉽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나간 초여름, 여름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날이었다. 반팔과 흰 바지를 단정히 입고 카페에 앉아 시원한 공기를 마시던 그때, 나는 산산한 바람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그날 가장 중요한 ‘걸치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얇은 스웨터 하나, 앞이 터진 가벼운 긴팔 윗옷 하나. 그 작은 옷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찬 공기와 따뜻한 몸 사이를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경계였다. 차에 몇 개씩이나 넣어 다니면서도 그날따라 그 한 개를 걸치지 않았다는 것이, 결국 내 몸의 경계를 스스로 허문 셈이 되었다.

 

열도 없고 몸살도 없었지만 팔과 종아리의 피부가 싸늘하게 시렸다. 체온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작은 불안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홍삼 엑기스, 꿀, 생강차, 쌍화차, 대추차, 계피차 등 따뜻하다 하는 것은 모조리 들이켰다. 찜질방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도 온기를 되찾기 위해 애를 썼다. 아픈 몸을 달래는 일은 늘 소란스럽고, 그 소란은 마음을 먼저 흔들었다. 기침이 폐렴으로 번질까 걱정되어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제야 ‘내 고뿔이 남의 염병보다 더하다’는 말이 뼈에 와닿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황소처럼 일하며 살아온 나였는데,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속담 앞에서 그 강단이 무색해졌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고, 자만은 누구에게나 조용히 틈을 탄다.

 

체온이 1도만 내려가도 면역력이 30%나 떨어진다고 한다. 정상 체온 36.5도를 지키는 일은 삶을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니어가 되고서야 새삼 깨닫는다. 나는 늘 몸에 열이 많다 여겨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도 싫어하고 뜨거운 음식은 식혀 먹었다. 그 사소한 습관들이 내 몸의 문을 조금씩 열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는 초록 바람이 불고 꽃들이 저마다 색을 펼치고 있었을 텐데, 가장 좋은 계절에 종일 누워만 있으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찔레꽃과 해당화가 한창일 때 그 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면 마음만 동동 굴렀다. 아프다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갇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늙는다는 것은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이 생기는 일만이 아니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며칠씩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몸이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일. 그 모든 것이 늙음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한 달여가 지나면서 체중은 3kg이나 줄고 얼굴은 작아졌지만 서서히 회복되었다. 아플 때는 아프지 않은 사람이 가장 부럽다. 그날, 그저 ‘걸치는 것’ 하나만 챙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삶은 늘 사소한 것 하나를 놓친 자리에서 가장 큰 깨달음을 건네준다. 작은 옷 하나가 몸을 지키듯, 작은 주의 하나가 삶을 지킨다는 것을 나는 이번에야 비로소 배웠다. 후회는 언제나 늦게 찾아오지만, 그 늦음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건강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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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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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9
2026-08-24
아버지의 비장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똑바로 살아라! 똑바로!

사군자와 아버지

요즘은 흔히 쓰지 않지만, 군자란?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을 일컫는데, 완전한 인격을 가졌다는 뜻이다.

‘사군자(四君子)’란? ‘네 가지 군자’라는 뜻으로, 네 가지 식물이 지닌 고귀한 품성을 군자에 비유한 말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가리켜 사군자라 칭했으며, 사군자는 동양화의 소재로 동양화가들은 묵화를 치며 군자의 도를 닦았다. 사군자를 이르는 말로서 매난국죽(梅蘭菊竹)을, 우리말 규범표기로는 ‘매란국죽’이다.

 

 

사군자를 간단히 설명하면,

매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릎 쓰고 제일 먼저 눈 속에서 피어나는 꽃으로, 봄을 상징, 꽃말은 희망, 고결, 인내라고 하며, 또한 선비의 품격과 절개를 대변하는 꽃이라 한다.

난초- 산중에서 비와 이슬을 받아 살면서도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은은한 향기를 멀리멀리 퍼트리는 강인한 성품의 꽃, 여름을 상징, 꽃말은 겸손, 우아함, 고결함이라고 한다.

국화- 늦가을 매서운 서릿발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라는 뜻으로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표현했으며, 다른 꽃들이 피었다가 다 졌어도 홀로 꼿꼿하고 우아하게 피어나는 국화는 가을을 상징, 꽃말은 고귀함, 절개, 장수라고 한다.

대나무- 곧게 뻗은 줄기에 속은 비었으나 꺾일 줄 모르고, 사계절 푸름을 잃지 않으며, 추위 속에서도 굳은 절개를 지키는 대나무는 겨울을 상징, 드물게 꽃이 핀다. 꽃말은 지조, 강인함, 유연성이라고 한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사군자를 좋아하셨다. 강하다는 의미가 중심이 되는 식물들이기 때문일까?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사군자를 치셨고, 평생에 한문과 한글, 해서, 행서, 초서체를 막론하고 붓글씨를 참 많이도 쓰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사남매에게 호를 지어 주셨는데, 사군자로부터 힌트를 얻으신 것 같다.

오빠는 큰 아들이라고 강하며 품격을 잃지 말라, 또한 엄동설한을 이겨내는 매화처럼 소리 없이 인내하라는 뜻의 호로 ‘매은(梅隱)’이라고 지어주셨다.

나에게는 난초의 향기를 은은하게 풍기며, 고고하고 강하게 살라는 ‘난은(蘭隱)’ 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내 바로 밑의 남동생은 ‘국은(菊隱)’ 이라고 호를 칭하였으니, 매서운 서리 발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절개를 지키라고 하셨다.

막내남동생은 ‘죽은(竹隱)’이라고, 대나무처럼 강하면서도 유연하게 푸름의 절개를 지키라고 하셨다.

 

우리 사남매는 과연 아버지가 지어주신 호처럼 살았는가? 또 살고 있는가? 나의 양심은 무겁기만 하다.

아버지께서는 예전에 우리 사남매를 밥상머리에 앉혀놓고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듣지를 말라고, 꽁보리밥을 소금물에 찍어먹더라도, 굶어죽게 생겼어도, 아니 굶어 죽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마라, 도둑질은 하지마라, 차라리 굶어죽어라 하시며, 정직하게 살아야 하늘과 사람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다고 수없이 하시던 말씀이, 평생 가슴 깊숙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나도 나의 세 자녀들에게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씀대로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내 비록 한국에서 먼 캐나다 땅에 살고 있지만, 하루의 삶속에서 항상 아버지와 엄마의 눈동자가 나를 떠나지 않고 있음은, 나의 수호신이라고 믿기 때문일까,

사군자의 하나로 난초처럼 살지는 못할망정, 칠십 중반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가?

아버지의 비장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똑바로 살아라! 똑바로!

 

정직, 성실, 검소, 절약이 가훈이었던 우리 집안이었다.

hongsj
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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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1
드디어 만났다. 꼭 만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새벽

인간 승리

 

드디어 만났다. 꼭 만나고 싶었는데.

 

 지난 이른 봄 이었나? 어느 날 새벽, 

 내가 가고자하는 그 가게는 오전 7시에 오픈한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하며 잠을 잤는데 눈을 뜨고 보니 6시,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더 누워 있다 간 다시 깊은 잠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눈을 뜬 김에 아주 일어났다. 

 

 운전석에 앉아 차창으로 보이는 밖은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여명 속에 나뭇잎 사이로 설핏 보이는 무엇이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사람이 다리 한쪽은 없는데 목발도 없이 한쪽 다리로 콩, 콩, 콩, 콩. 점프하면서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 이 어둑새벽에 한쪽 다리로 점프하면서 뛰어가다니 . 도대체 한 쪽 다리로 저렇게 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순식간에 그 사람이 없어졌다. 

 나는 출발하려던 차에서 내려와 두 손으로 나뭇가지와 잎을 헤치고 그 사람이 또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그 쪽 공원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아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허깨비를 보았나? 무엇에 홀렸나? 어떤 것을 잘못 보았나? 이게 웬일인가? 고개만 갸우뚱해질 뿐.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 나는 그 근방에 가면 그곳을 바라보며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라도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서다. 확인하고 싶었다. 다시는 안 나타날까? 그 일이 사실 이었나? 

 

 9월 어느 토요일 오전 9시경, 나는 운동 삼아 좀 걸어야 하겠기에 늘 눈여겨보던 그 작은 공원에서 왔다 갔다 걷다가 벤치에 잠깐 앉아 있는데, 한쪽 다리의 그 사람이 나타났다, 세상에. 정말로. 

 토끼눈을 뜨고 보니, 양쪽 겨드랑이에 끼었던 두 목발을 빼서 큰 나무둥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놓고, 한쪽 다리가 없으니 오른쪽 한쪽 다리로 콩, 콩, 콩, 콩 점프하면서 앞으로 뛰어가는 게 아닌가! 오 마이 갓! 

 즉시 나는 핸드폰으로 비디오를 찍으며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 사람은 저만큼 갔다가 돌아서 다시 목발 있는 쪽으로 콩, 콩, 콩, 콩 점프하면서 한 발로 헐떡거리며 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와우 너 참 대단하다, 진짜 용감하다, 정말 최고다” 등 아낌없는 찬사와 응원의 말을 했더니, 심장이 벌떡대며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채 땡큐! 땡큐! 를 연발한다.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오래전부터 너 만나기를 원했어.”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땡큐! 땡큐! 를 잊지 않았다. 

“너 언젠가 새벽 미명에 여기를 뛰었지? 그때 나는 한 발로 점프하는 너를 보았고, 내 생각에 테리 확스(Terry Fox)가 살아서 왔나? 하며 너무 놀랐어.”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는 새벽 어둑할 때 가끔 여기 와서 테리 확스처럼 점프하며 달리는 운동을 한다고 했다. 

 속으로 반갑기도 하고 얼마나 놀랬던지. 이 일이 사실이라니.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의 키는 185cm 정도가 넘어 보이는 건장한 흑인이었고, 이름은 제임스, 32세며 자메이카에서 캐나다 토론토로 온 지 14년이 되었고, 7년 전에 노동하다가 다쳐서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 손으로 가리키는 저쪽 아파트에서 산다고 하며, 걸 후렌드는 백인 케네디언 동갑내기라고 했다. 걸 후렌드가 있다는 것에 힘주어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활짝 웃으며 두 엄지 척을 해주었다. 컴퓨터를 공부한다며 정부에서 얼마간의 돈도 받는다고 하고, 심호흡을 멈추지 못하는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테리 폭스 알아요? 너처럼 한쪽 다리가 없지만, 한쪽은 의족을 끼고 희망의 마라톤을 한 이곳 캐나다의 젊은 운동선수, 암 연구 활동가?” 그는 안다 고를 반복했다.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알아요?” 안다고 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몸으로 늘 웃고 감사하며 불가능은 없다고 하는 닉 부이치치, 결혼하여 4명의 자녀들도 두었어요. 유튜브에 비디오 많이 나와 있어요.” 그는 다 알고 있다며, 나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이름과 몇 살이냐고 묻는다. 

“한국, 남쪽 한국, 72세, 헬렌”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도 테리 확스처럼, 닉 부이치치처럼 희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고 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서 나는 분명히 희망을 보았고, 위대한 도전을 하는 그에게서 인간승리를 보았다.

  

 제임스는 공원 주위를 뛰면서 내면의 어떤 세계를 꿈꾸며 뛸까? 그가 원하는 세계를 향하여 저토록 점프하는 그의 희망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 것이다, 그렇지, 비록 다리 한쪽은 없더라도 운동부터 해 놔야 하는 것이 건강의 기본일 것이다. 최선을 다 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가슴 아픈 동정이 앞섰다. 그런데 말이다, 정작 동정 받아야할 사람은 나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두 다리 멀쩡해가지고 오늘도 걸을까? 말까? 망설이며 주저하고 머릿속에서는 걷지 말아야 하는 핑계를 계속 찾는다. 게으름을 피우는 나는 참으로 한심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제임스가 이 공원에 오는 날과 시간을 알았으니 그를 만나면 그의 옆에서 함께 점프하며 달릴 것이다. 

hongsj
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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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엄마, 색소폰 부는 것은 좋지만 유행가는 불지 마”

“엄마, 색소폰 부는 것은 좋지만 유행가는 불지 마”

아들 녀석이 말한다. 

 

 제 생각과 안 맞는가 보다. 우리들은 만나면 가곡이 어떻고 가요가 어떻다며 입방아 언쟁을 벌인다. 나의 큰 사위는 이태리에서 10여년이상 성악을 공부하고, 이태리 로마 한인 동포사회에서 활동하는 바리톤 성악가이다. 또한 둘째딸은 한국에서 활약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너희들은 너희들 좋은 대로 해라, 물론 나도 찬송가나 가곡, 동요 등을 좋아 하지만, 색소폰으로 연주할 때면 가슴속에 젖어있는 흘러간 가요가 더 맛이 난다.”고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 주장은 가곡이든 가요든 때와 장소 그리고 분위기와 취향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들 클래식이라 부르는 가곡을 노래하거나 악기로 연주하면 인격이나 음악수준이 올라가고, 뽕짝이라 부르는 대중가요를 하면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마음을 터놓고 어우러질 자리에서 갑자기 엄숙한 클래식 곡을 연주하는 것은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요즘 한국에선 애창하는 가요들을‘흘러간 유행가’라고 하지 않고, ‘가요명곡’이라고 부른다. ‘흘러간 유행가’가 흘러가버리지 않고 언제 다시 불러도 싫증이 나지 않기 때문에‘명곡’과 뭐가 다르겠느냐는 주장인 것 같다.    

 

 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한 일이 예전에 있었다. 

몹시 추운 2011년 1월 어느 토요일. 캐나다 문협 신년회와 신춘문예 시상식이 토론토 한국일보 도산 홀에서 있었다. 문협 회장이 이메일로 보낸 순서지를 보니 나의 색소폰 연주는 2부 순서로서 여흥 순서였다. 모두를 흥겹게 하는 가요명곡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첫 곡으로‘얼굴’을 택했다. ‘얼굴’은 우리나라 가곡도 되고, 가요도 되지만 노래자체가 좀 은은한 편이어서 중간 중간 테크닉을 넣으며 1절을 불고 나니 반응이 좋았다. 2절까지 부르니 실내의 체감온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두 번째 곡으로는‘꿈에 본 내 고향’으로 나이 드신 분들을 겨냥했다. 그러자 L교수 내외분이 앞으로 나와 춤을 추고, 다른 분들도 합세를 하니 분위기가 무르녹았다. 이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소폰 연주곡, 고음으로 부는 Sil Austin 의‘적과 흑의 부르스’를 정열을 다해 연주했다.

 이 곡의 끝부분에 가서는 내가 좋아하는 대목으로 롱 턴을 한없이 길게 뺐더니 참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이 끓어올랐다. 

 

 거기서 끝을 내려니까 회장이 와서 팔을 붙잡으며 악기를 넣지 말라고 한다. 3부 순서에도 또 해달라는 것이다. 3부 순서에선 이미자의‘동백아가씨’를, 그 다음 곡으로‘선창’에 이어‘나그네 설움’을 불었다. 모두들 눌려 있던 감정들이 일시에 분출하는 모양이었다. 

 

감정 표현들을 자제하지 못하겠는지 박수를 치며 고성까지 지르고 난리였다. 내가 클래식 가곡을 불었다면 이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모두들 나를 둘러싸고 한 마디씩 던지니 '스타 탄생'의 기분이었다.

 

 많은 분들의 칭찬을 들으니 우선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서서히 마음은 무거워졌다. 내가 연주를 잘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실은 기대 보다 좀 나았다는 표현이 옳은 게 아닐까.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해야만 그들의 기대치에 미칠 텐데 어떡한다? 부담감이 왔다. 그러나 그 부담감은 나를 더 키울 수 있는 기회이고 자극제이다. 부담감은 스타트를 어렵게 하지만 일단 가속이 붙으면 더 빨리 달릴 수 있게도 하리라.

 뿐만 아니라 연습하는 시간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는 절박한 이유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삶은 도전이다. 

 

 이 나이에 색소폰은 아무나 부나, 

 미쳐야 불고, 용감해야 분다. 

 

hongsj
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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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9
윤달? 이 무엇이길 래, 이런 소름 돋는 일을 해도 탈이 없다는 말인가?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윤달? 이 무엇이길 래, 이런 소름 돋는 일을 해도 탈이 없다는 말인가?

 

윤달(閏月)의 윤자를 한문으로 보면, 남을 윤, 정통이 아닌 임금의 자리 윤자다. 문안에 임금이 있는 모양새다. 윤달에는 왕이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던 고대의 풍습에서 “윤달”의 뜻이 되었다고 한문풀이에 나온다.

정통은 아니지만 나도 한 달 동안 임금일 수 있다는 말인가?

 

 

윤달은 음력으로 평년의 12개월보다 1개월이 더하여진 달이다.

올해 2025년에는 윤달이 들어있다. 양력 7월 25일부터 8월 22일까지 이고, 음력으로 6월 한 달 29일이며, 덤으로 얻은 달이라고 한다.

 

음력이란 주로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대만, 몽골 등)문화권에서 사용하며, 서양에서는 음력을 사용하지 않고 보통 약력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달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에서 한 달은 29일과 30일을 번갈이 사용하는데, 1년 12달을 합한 수는 총 354일이 된다. 그러나 365일을 기준으로 하는 태양력과는 11일의 차이가 생긴다. 양력과 음력 차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윤달을 추가하여 음력과 계절의 차이를 줄이게 된다는 것이다. 윤달은 보통 2-3년에 한 번씩 오는데, 19년에 7번의 윤달을 둔다.

 

역법(歷法)에 의하여서이다.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고 체계화하여 달력을 만드는 방법이다. 참으로 신비로운 주기이다.

 

윤달(閏月)이란? 즉 음력에서 한 해의 계절과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추가되는 달인데, 음력에서 1년이 12개월 보다 1개월이 더 많아지는 달이다. 이 윤달을 흔히 ‘공달’ ‘덤달’ ‘여벌 달’ ‘남은 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새해 새 달력을 보면, 양력으로 2월에 29일이 들어있는 해가 있다. 그 해를 윤년(閏年)이라고 하고, 2월 29일 단 이 하루의 이름을 윤일(閏日)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윤일에 태어난 사람은 4년에 한번 생일이 돌아오니 어쩌란 말인가? 4년에 한 살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음력으로 생일을 지낸다 하고, 평년에는 2월 28일을 생일로, 또는 3월 첫째 날을 생일로 지낸다고 하니, 달력 때문에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현대 양력달력의 시작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정하는 역법(歷法)체계로서 윤년을 포함한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을 쓰고 있다. 그레고리력이란 명칭은 달력을 제정하고 반포한 교황인 그레고리오 13세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성경 창세기부터 나오는 누구는 몇 살에 죽고, 또 누구는 몇 살에 죽고가 나오는데 창세기 때는 어떤 달력을 썼나? 참으로 궁금하다.

 

옛 조상들은 이 공짜로 생긴 윤달에는 무슨 일을 해도 손을 타거나 부정을 타지 않는 달, 무탈한 달로 여겨, 평소에 꺼리거나 미루던 일들을 했다고 한다. 집안에 노인들이 계시면 수의를 만들고, 조상의 묘를 이장한다거나 단장하기도 하고, 집수리 혹은 이사도 하고, 특히 혼례를 올리는 날도 윤달에 잡았다고 한다.

 

하늘과 땅의 신들이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쉬는 기간으로 생각하여, “귀신도 피해 가는 달”이라며, 오죽하면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는 속담도 여기에서 유래했을까.

 

예전 어릴 적 스치는 생각이, 어른들이 윤달이라고 누구 네는 수의 감을 사다 놓았다느니, 어느 포목점의 삼베가 좋다느니, 남자 분 수의와 여자분 수의를 구경하러 가자는 말을 언뜻 들은 적이 있다.

 

내 친정 충남 보령 선산에는 대대로 조상님들의 묘가 있었다. 고향을 지키시던 숙부님께서는 연로하시고, 일가친척 자녀들은 다 도시로 갔으니 선산은 누가 지키고 풀 깎으며, 때때로 묘를 누가 보수하며 돌보겠나? 숙부님께서는 어느 해인가 윤달에 이 묘들을 다 파서 화장하여 조상님들의 유골을 모신 납골당을 만드신 큰일을 하셨다.

 

윤달 이야기는 천체우주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과학적이면서도 전설 같은 이야기여서 더 흥미진진하다.

 

오늘은 윤달 6월 6일이다. 삼계탕 잘하는 집에서 지인들이 모여 이열치열 하잔다.

 

(양력 2025. 7. 30. 음력 2025. 6월 6일, 중복에)

 

hongsj
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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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9
토론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캐나다 한인 이민자들의 삶과 정서를 진솔하게 담아

 1991년 캐나다로 이민한 후, 토론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캐나다 한인 이민자들의 삶과 정서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여류 수필가입니다.

주요 수필집

캐나다 현지에서 이민 생활의 경험과 깊이 있는 인생 성찰을 담은 수필집들을 꾸준히 발간해 왔습니다. 

  • 제1집 《따뜻했던 화면》: 캐나다 한인 문학계에 첫 발을 내딛으며 출간한 첫 수필집입니다.
  • 제2집 《내가 찾던 인연》: 한층 더 성숙해진 문학 세계와 다방면의 삶의 깊이를 담아낸 두 번째 책입니다.
  • 제3집 《우리가 오르는 산》: 코로나19 대유행 등 전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집필을 이어가 발간한 책으로, 62편의 수필을 통해 인생의 이정표와 용기를 전합니다. 

나의 문학적 특징과 활동 ( 구글의 검색의 내용)

  • 정열적이고 넓은 문학적 폭: 잔잔하고 조용한 일반적인 서정 수필의 틀을 깨고, 70대 이후의 나이에도 뜨거운 정열과 도전정신, 구도자적인 넓은 시선을 보여줍니다.
  • 활발한 언론 연재: 토론토 중앙일보의 주간지 연재를 비롯해 캐나다코리안뉴스 오피니언에 ‘홍성자 수필향기’라는 칼럼을 통해 〈청바지 예찬〉, 〈윤달 소고〉 등 대중적이고 친근한 수필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습니다. [1, 2, 3]
  • 문학 단체 활동: 국제펜(PEN) 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 캐나다한인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캐나다 문학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 2]
  • 가족 관계: 캐나다 한인 사회 최초이자 유일한 판사인 홍중표 씨의 배우자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수필집에 부부의 인연에 관한 진솔한 고백을 담기도 했습니다

 

북미주의 한인 이민1세로 판사로 역임한 분은 오직 한분 ~

캐나다 홍판사. 홍중표판사의 저서 : 상상의 세계를 넓혀라

 

hongsj
홍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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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9
오르막길


일기예보가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질 수가 있나?
4-5일 전부터 2월15일 목요일 오후 눈 폭풍이 온다고 어지간히 예보를 해대더니, 드디어 15일이 되었다.
이곳은 토론토의 노스욕 지역이다. 낮 12시가 되어도 눈이 올 것 같지 않은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오후 1시까지도 그랬다. 저런 하늘에서 무슨 눈이 온다고 그러나? 일기예보가 맞을까?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후 1시 넘어서는 밖에 안 나가려고 했으나 부득이한 일로 가까운 곳이길래, 미심쩍었지만 눈이 와 봐야 얼마나 오겠나? 하며 길을 나섰다. 일을 보고 돌아오려고 하니 3시 반이었다. 실내에 있어서 몰랐는데 밖에 나오니 이게 웬일인가? 자동차 위에 눈은 바람에 흩어지면서도 소복이 쌓였고, 폭풍은 몰아치는데 앞이 안 보였다. 어떻게 집에 가야 하나? 왜냐하면 길이 약간 오르막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눈이 많이 왔지만, 눈이 더 오기 전에 아무튼 서둘러 가자는 것이 내 심산이었다. 길에는 차들이 기어서 가다시피 줄을 이었는데, 제설차량은 아직 눈을 치우지 못한 상태였고, 계속 퍼붓는 눈의 양은 엄청났다. 하늘의 눈 창고가 터졌나?

 

아 역시 캐나다구나! 실감하면서 설경 사진 찍을 궁리를 하고 살살 운전을 하며, 나도 좀 들어가자, 틈 좀 주라, 신호를 깜박깜박 주면서 차선 속에 끼어 들었다.

그런데 차들이 도무지 앞으로 가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사고가 났나? 기다리면서 조금씩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는 멈추면서 겨우 50m 쯤 왔을까, 눈 폭풍은 몰아치고 오르막길에서 차 한 대가 앞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뒤로 밀렸다가 스톱했다가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보니 타이어는 많이 닳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내 차는 그 차의 두 번째 뒤에 서 있었다. 그 뿐인가? 그 차 옆은 도로에 딱 붙어가는 가오리같이 생긴 납작한 스포츠카 한 대가, 도로를 가로 질러 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이다. 도통 차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로질러 누운 차는 그렇다 치고, 뒤의 차들은 빵빵대며 소리를 지르니 어쩌란 말인가?

못 올라가는 문제의 차는 오래된 미니밴으로, 오르는 길에서 힘이 없어 못 올라가는 경차로 보였다. 계속 오른쪽으로 올라가 보려고 하다가 또 왼쪽으로 올라가 보려고, 바퀴만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여 액셀러레이터만 밟아대니 전선 타는 냄새에, 그 차 운전자의 가슴 타는 냄새인 듯 연쇄적인 큰 사고로 이어질까 내 가슴까지 타 들어갔다.

 

앗 차! 밀리면 앞차가 뒤로 내 차를 받기는 순간이고, 뒤차들도 내리막길이니 줄줄이 밀리면 도미노 현상으로 해외토픽 감일 것이다.

나는 눈 폭풍 속이지만 차에서 내려 도로 가운데로 와서, 뒤차들 운전하는 분들을 향하여 두 팔을 쭉 뻗어 올려 손짓과 팔짓으로 “다 나와라, 나와서 저 차를 밀어 주자, 저 차를 길가로 밀어놓자, 그래야 우리도 갈 것 아니겠느냐?” 신호를 보냈다. 두 팔을 휘저으며 계속 내 가슴도 쳤다. 눈 폭풍 속에서 내가 하는 짓이 희미했겠지만, 차들은 빵빵대지 않았고 소리도 안 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나?

나 혼자 말이지만, 한국 같았으면 아무리 눈보라 속이라도 운전자들이 차 세워놓고, 벌떼처럼 달라붙어 못 올라가는 저 차를 번쩍 들어서 옆으로 옮겨놓고 말았을 것이다. 암 하고도 남았지. 
한국을 보아라, 한국전쟁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눈부신 발전을 했나? 도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 팔 걷어붙이고 물불 안 가리고 돕는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로, 맥주를 싣고 가던 차가 커브를 돌다 옆으로 쓰러져 맥주가 도로에 다 엎어지고 깨져 난리가 났지만, 지나가던 차들이 길가에 차들을 모두 세워놓고, 벌떼같이 왕왕대며 깨어진 맥주병들을 말끔히 치워놓고 가는 것을 캐나다 뉴스에서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한국이란 나라가 목하 수직 상승하고 있지 않느냐?

캐나다가 발전하지 못하고 이 모양인 것은 캐나다에 사는 우리들이 너무 소극적이고 용기도 없고 이기적이라서 그렇지 않으냐?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가슴만 두 방망이질에 열불 나는 중, 마지 못한 듯 이차 저차 속에서 남자 다섯 명이 나왔는데 한국인은 안 보였다. 나도 힘을 보태려고 나서니 저쪽으로 가라고 너는 소용 없다며 눈을 부라리고 소리를 지른다. 참나!

 

한 사람이 그 차 앞에서 무엇으로 눈을 치우는지 바퀴가 구를 수 있도록 눈을 치우고, 차를 오른쪽으로 운전해 보라고 손짓을 한다. 뒤에서 네 명과 또 한 명이 와서 차를 미니 천천히 오른쪽으로 붙어 가까스로 비켜서게 되었다.

드디어 눈 속에 갇혀있던 차들이 눈보라 길에 서서히 움직이며 오르막길을 오른다. 현대 쏘나타 내 차도.

많은 운전자들이 차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도 애가 타고 갈등은 오죽했으랴.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들이라고 마음이 편했겠나? 총 2-3시간 동안 눈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캐나다와 한국이 엇갈리며 비교가 되었다.

오르막길에서 눈길을 올라가지 못한 그 차, 그 운전자의 가슴은 새까맣게 탔겠지. 이번 기회에 힘 좋은 차로 꼭 바꾸기를 바란다.

힘! 힘이 없으면 못 올라간다. 힘 만이 살길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힘은 무엇인가? 극성을 떨어야 무엇이 되어도 된다는 것이 내 인생철학이다.

 

 

 

hongsj
홍성자
110911
9199
2023-12-14
팀호튼(Tim Hortons)의 새벽

 

 

일찍 자면 일찍 눈이 떠진다.

밖의 새벽공기는 언제나 신선해서 좋다.

여러 해 전부터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면, 커피향이 그리워 걸어서 15분 거리의 오전 5시에 오픈 하는 동네 팀호튼에 간다. 매일 가는 건 아니지만.

겨울에 들어선 요즘 새벽 6시 미명이지만, 사방이 조용한 어둠을 걷노라면 동네 사람들 잠자는 소리가 쌔근쌔근 들리는 듯하다. 비 오는 날이나 아주 추운 날은 차를 가지고 갈 때도 있다.

 

팀호튼에 들어서니 일하는 사람들은 커피 등을 팔면서 분주히 아침 비즈니스 준비에 바쁘다. 주중 새벽 6시경부터는 제일 먼저 들어오는 연두색의 형광 띠로 표시된 복장을 한, 밖에서 노동하는 분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간단한 샌드위치나 베이글 등과 라지 사이즈, 혹은 엑스트라라지 사이즈의 커피를 들고 나간다.

건축 현장이랄지 도로공사, 혹은 나무 자르는 일이랄지 전신주를 타는 사람일지 등등, 그들은 30도가 넘는 뜨거운 여름이나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에도 밖에서 일을 한다. 진심으로 고맙기 그지없다. 아침을 깨우는 커피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각양각색의 팀호튼 도너츠들을 보면 군침이 돈다. 크림 하나, 설탕 하나 넣은 레귤러커피나, 크림 둘, 설탕 둘을 넣은 더블더블 커피나, 뜨겁고 달달한 커피 향은 환상적이다. 때로는 혈당 이유로 블랙커피도 즐긴다. 우리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크림치즈를 듬뿍 바른 베이글을 오더할 땐 내 이름을 말한다, 저쪽에서 다 준비된 베이글을 들고 큰 소리로 ‘헬렌, 헬렌’ 부르기 때문이다.

7시 반이 넘어 8시 가까이부터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잠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 커피가 있었지만 다방뿐이었다. 여학생이 돈도 없고 다방에 들어갈 생각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지금 같아선 커피 샵에 가서 커피를 사서 마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 놈의 잠 때문에 공부를 못했던 기억이 새로운데, 나이 드니 그 많던 잠은 왜 안 오는지.

 

팀호튼이란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선수 이름이다. 그는 캐나다의 최상위 프로 아이스하키리그 NHL 주전 수비수로 스탠리컵을 4번이나 수상한 영웅이지만, 안타깝게도 1974년 44세 때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갔다.

팀호튼이 1964년에 ‘팀호튼 도넛츠’ 가게를 열면서 시작한 비즈니스가 지금은 4천 곳이 넘는 캐나다의 국민커피 브랜드로 성장하였다.

 

또한 참으로 현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은, 커피 등을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나 오더 한 것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앉은 사람들이나 서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핸드폰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핸드폰을 안 보는 사람이 있다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주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되어버린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팀호튼 샵의 입구에는 아침 일찍부터 늘 출근하다시피 하는 백인남자 베거(걸인)가 있다. 도대체 누구네 집 아들인가? 가끔 커피를 사 주지만 그는 커피를 스몰 트리플 트리플로 마신다.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세 개씩 넣으라니 커피보다도 크림과 설탕 맛으로 먹는 게 아닌가? 밥보다 고추장이 많은 격이다. 추운 날은 시멘트 바닥에 그냥 앉아있으니 엉덩이는 또 얼마나 시리겠는가? 나는 박스조각들을 준비해서 차에 싣고 다닌다.

 

“이거 깔고 앉아.” 그도 앉아보니 시멘트의 찬 기운을 막아주며, 자기 엉덩이의 체온으로 박스조각을 미지근하게나마 데워주게 되니 좋은가 보다. 나에게 엄지 척을 해 보인다. 시멘트바닥에 앉을 때는 임시방편으로 박스조각이 최고임을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참 웃기는 여자야, 그것도 아시안 한국의 충청도 아줌마가 캐나다 토론토까지 와서, 모 하십니까?

감사와 즐거움으로 시작하는 상큼한 아침이다.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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