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강바람이 ‘양귀비’를 스치면…

 

아내가 친구 집에 갔다가 양귀비꽃 한 다발을 얻어 왔다. 꽃잎이 떨어지고 씨방이 생긴 것인데, 친구가 “아직 여물기전이니 잘 말려서 씨앗을 받아라”며, 잔털이 많은 꽃대는 씨를 받은 후에 끓여 먹으라고 했단다.

“끓여 먹으면 뭐에 좋은데?”하고 물으니 “나도 모르지”라고 한다. 하긴 양귀비는 그래도 아편을 만드는 건데, 끓인 물에 몽롱한 성분이라도 있겠지 싶어 기대된다. 혹시 이거 먹고 잡혀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데’ 일단 먹어 봐야지…

몇 년 전에도 양귀비 씨앗을 정원에 심은 적이 있는데, ‘예쁜 값’을 하는지 까탈스럽게 새싹만 피우다가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꽃 가꾸기도 사실 요령과 전문 지식이 필요한데 무작정 땅에다 심고 물만 주었으니 낭패를 본 것이다.

 양귀비 파종 시기를 찾아보니, 가을에 심어 이듬해 봄에 꽃을 보는 것이 안정적이라 한다. 추운 지역에서는 3월에 심는 것도 가능한데, 땅에 직접 심지 말고 화분에 키워 봄에 아주 심기를 하는 것을 권한다고 하니, 그동안 뻘짓만 한 셈이다.

며칠 전, 고국의 TV 프로그램에서 진풍경을 보았는데,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처녀 뱃사공 노을길>을 찍은 영상이다. 남강과 함안천이 합류하는 악양둑방길 이었는데, 2.7km 길이의 둔치와 둑길에 꽃양귀비를 심어 관광 코스로 개발했다. 새벽녘 물안개나 해질녘 노을이 더해지면 이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이 악양의 양귀비꽃 길은 ‘함안 9경’에 속한다. 저렇게 양귀비를 심어도 되나 싶었는데, 아편 만들 때 쓰는 씨방은 생기지 않는 관상용 꽃양귀비라고 한단다. 5월부터 7월 초순까지 핀다고 하니, 요즘이 딱 제철이다.

함안천 건너편에 악양루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 고개 중턱에 <처녀 뱃사공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 헤야 데 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이 ‘처녀 뱃사공’은 1959년에 윤부길이 노랫말을 쓰고 한복남이 곡을 붙였다. 처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황정자이지만, 배우 김자옥의 남편인 오승근이 불러 널리 알려지며 국민 애창가요가 된다. 작사가 윤부길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부길부길 유랑극단>의 단장을 지냈다. 그는 가수 윤복희와 윤항기의 아버지다.

6.25 전쟁이 막 끝난 1953년 9월에 함안에서 공연을 끝내고 강 건너로 가던 중, 악양나루를 지나게 된다. 악양나루는 낙동강의 큰 지류인 남강과 함안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곳에서 군에 입대한 후 소식이 끊긴 오빠를 기다리며 그를 대신해 노를 저어주던 20대의 처녀 뱃사공을 만난다. 그녀는 늙은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보살피며 뱃사공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사연을 들은 윤부길은 ‘처녀 뱃사공’을 작사하게 된다. ‘처녀 뱃사공’과 ‘양귀비’를 짝지어 평범한 둑길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한 것은 멋진 아이디어다.

 

고향이 함경북도 회령인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부모님을 따라 연변 왕청현 하마탕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왕청은 흑룡강성하고도 산으로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 왕청에는 항일 빨치산의 근거지가 있을 정도로 오지였는데, 하마탕은 왕청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곳이다.

수시로 나타나는 비적들 때문에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는 높은 담을 성처럼 쌓고 그 안에서 양귀비를 재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변변한 약도 없을 때이어서 양귀비에서 추출한 아편은 감기나 두통, 배탈이 나거나 할 때 먹었을 정도로 ‘만병 통치 상비약’ 이었다고 한다. 양귀비로 술도 담가 먹고 국수나 빵 같은 음식에도 씨를 넣어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머니는 “양귀비는 한마디로 예쁘다”고 했다. “깊고 진한 빨강은 양귀비가 아니면 내기 어려운 검붉은 색이었다”고 한다. 지천에 양귀비가 깔려 있는데,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졌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아마 아편 성분 때문이 아니라 강렬한 색깔 때문인 듯하다. 양귀비는 붉은색, 자주색, 노란색, 흰색, 주홍색 등이 있는데, 주종은 역시 붉은색이다.

 

 

캐나다에서는 현충일(Remembrance Day)에 양귀비꽃을 가슴에 단다. 1921년부터 현충일을 기념하기 위해 양귀비꽃을 사용했으니 벌써 101년이나 됐다.

온타리오 구엘프 출신의 중령인 존 맥크래(John McCrae)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의무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1915년 5월 동료 군인이 전사한 후, 한 편의 시를 썼다. ‘플랑드르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라는 이 시는 캐나다에서 양귀비를 추모의 상징으로 사용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 유명한 시에서 양귀비꽃이 언급된다. 시에서도 등장하듯 잔해 속의 석회는 양귀비의 비료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유럽, 특히 석회질이 풍부한 토양인 프랑스, 벨기에와 같은 국가에서 이 꽃은 널리 자란다.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플랑드르 들판에서’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은 안나 게린(Anna Guerin)이라는 여성은 <캐나다왕립군단(Royal Canadian Legion)>의 전신인 <참전용사협회>를 설득해 양귀비를 추모의 상징으로 채택하게 했다.

그녀는 1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프랑스 일부를 재건하기 위해 자선 단체를 설립하는데, 천으로 양귀비를 만들어 재향 군인과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것을 판매한다. 그 아이디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양귀비 씨앗은 채송화 씨앗이나 모래알보다도 작은데, 그 속에 예쁜 생명이 숨어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도도하면서도 화려한, 선명하고 요염한 꽃잎은 바람이 불면 휘어지며, 그 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살랑살랑 유혹하니 시선을 녹이고 만다. “양귀비는 한마디로 예쁘다”는 어머니의 표현이 딱 맞는 말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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