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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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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님-나에게 큰 영향 끼친 인물


▲어머니 생신 때 대전 본가에 모인 가족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굴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의 성격 형성과 진로문제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물론 가족이다. 그 중에도 위로 두 형님은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특히 내가 일찍(여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자연히 형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기에 더욱 그렇다.  

          

 3남2녀 종갓집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두 형님에게 왠지 컴플렉스를 느낄 때가 많았다. 형님들은 생김새나 공부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던 것이다. 중고등학교도 형님들은 명문교를 다녔으나 나는 1차에서 낙방해 후기학교를 다녔다.

 

0…나의 큰형님은 비록 작은 시골동네였긴 하지만 인근에 ‘천재가 났다’는 소리를 듣던 수재였다. 인물도 여성처럼 곱상하게 생겼고 성격도 섬세한데다 공부도 잘했다. 종가(宗家) 치고는 빈한한 형편이었던 집안에 그나마 조상님들께서 두뇌 하나만은 내려주셨는지 5남매 모두가 머리 좋다는 소리는 듣고 자랐다(막내인 나도 거기에 묻어갔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시면서 큰형님은 사춘기를 갓 넘은 나이에 집안의 기둥역할을 떠맡아야 했고 대학은 생각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공직세계에 뛰어 들었다. 당시 궁핍한 집안의 유일한 출세 관문이었던 사법고시에도 도전해 3개월 만에 1차에 합격했으나 우선은 집안살림을 보태는 것이 급했다. 이에 형님은 보통고시(지금의 7급 공무원 공채)를 통해 지방관청에서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동기들보다 앞서 승진을 거듭하며 잘나가던 형님은 그러나 중앙부처에서 직속상관을 잘못 만나는 바람에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상관과 부딪치며 괴로워하던 형님은 어느날 모두가 부러워하는 공직을 휴지처럼 내던지고 대전 본가로 낙향해버렸다. 그후의 삶은 홧술에 의지한 채 파락호(破落戶)로 전락해갔다. 동네사람들은 그런 형님을 볼 때마다 “참 안됐다”며 혀를 차곤 했다.

 

0…그 와중에도 세상을 앞서 내다보는 큰형님의 예리한 안목에 나는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가끔씩 휘갈겨 쓰는 붓글씨는 거의 프로 수준이었다. 술만 드시는 나날 속에도 옛 위인들의 행적을 줄줄이 꿰는 것을 보고서도 역시 형님은 범접하기 어려운 큰 바위같은 존재로 비쳐졌다.

 

 큰형님은 그러나 폭음에 시달리다 건강이 악화돼 예순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서울 형님 댁에 빌붙어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던 모습이 꿈에 자주 나타난다. 지금 생각하면 형님 서재에 꽂혀 있던 많은 책들은 나의 청소년 시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형님의 다정다감한 성격도 많이 물려 받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 기둥 역할을 하던 큰형님마저 세상을 뜨자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형님이 대청호반 선영(先塋)의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묻히던 날, 어스름히 떠오르던 저녁노을의 처연한 빛깔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내면에 흐르는 허무주의는 이런 성장 배경에서 싹튼 것이리라.     

 

0…작은형님은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형님은 외모도 잘 생겼고 공부도, 운동도, 뭐든 잘했다. 원래 차남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어서 인생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지 않던가. 형님은 충청도 인재들이 다 모인다는 D중고교에 다녔는데 성적도 우수하고 리더십도 강해 장래가 촉망됐다.

 

 그러나 그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큰형님처럼 일찌감치 공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두뇌 좋고 성품 곧으신 형님은 공직에서 승승장구했다. 예쁜 형수를 만나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유난히 금실이 좋던 작은형님 부부는 어디나 함께 다녔고 그런 두 분에게 나와 작은누나는 은근히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박봉(薄俸)의 공무원 생활로는 살림이 풍족할 수 없었고, 형수는 이런저런 부업을 했다. 화장품 가게도 그 중 하나였다. 형님 신혼집에 들어서면 은은히 풍기던 화장품 냄새가 지금도 아련하다.

 

 그러다 우리는 이민을 왔고 형님네는 딱 한번 캐나다를 다녀가셨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소식 주고받는 횟수도 줄고 명절 때나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에 그쳤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 3년 전 누님이 전해온 소식이 놀라웠다. 형수가 기침을 심하게 해 진단을 받아본 결과 폐암 말기라고… 나와는 대여섯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고운 형수님은 그렇게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0…2년 전, 가족들과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작은형님은 머리 염색을 하지 않아 백발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을 잃고난 후 형님의 모습은 10년은 앞당겨 늙은 것 같았다. 형님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메기의 추억’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서 말이 안 나왔다. 겉으론 여전히 의연한 듯해도 옆모습은 한없이 외로워 보였다.     

 

 내가 큰형님으로부터 학구적인 면을 많이 본받았다면 작은형님에게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남성적인 면을 본받으려 했던 것 같다. 의협심과 행동력을 두루 갖춘 작은형님, 박봉임에도 내가 가면 손에 꼭 용돈을 쥐어주시던 내외분. 영원히 아름다울 것만 같던 형수님은 이제 이승에 없다.

 

 나라도 형님 곁에서 함께 외로움을 달래가며 살고픈데 현실이 그렇질 못하니 안타깝다. 고향 산천에 눈 내리던 겨울날, 형님과 옆동산을 누비며 공기총 사냥을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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