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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I 배경 영화(V)-'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5·끝)

 

(지난 호에 이어)

 이튿날 아침, 어린 딸 롯테가 큰 식탁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데 두 개의 의자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다. 엘자가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한다. 그녀의 남편은 베르됭 전투에서, 세 형제들은 각각 리에쥬 전투(Battle of Liege), 샤를루아 전투(Bataille de Charleroi) 및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에서 전사했다며 조용히 '우리의 위대한 승리'라고 되뇌는 엘자. [註: 마지막 세 전투는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 8월5일에서 8월30일까지 치른 일련의 전쟁으로 독일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쓸모없는 연습(futile exercise)'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르누아르 감독은 이를 통해, 한 개인의 용감성과 명예, 의무 등이 큰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낭만적 논리를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마레샬과 로젠탈이 전선으로 되돌아가 싸움으로써 이 전쟁을 끝내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이상적인 사고(思考)를 깔아 뭉개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전쟁 속, 일 개인은 장기판의 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같은 맥락이다. 참고로 르누아르 감독은 1차 대전 때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했다. 이 장면에서 장 가뱅이 입고 있는 유니폼은 르누아르 감독이 그때 실제 입었던 군복이다.]

 그러나 그녀는 둘을 독일군에게 넘기지 않고 오히려 관대하게 도와준다. 마레샬은 비록 독일어를 못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녀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롯테를 위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을 선물하여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로젠탈이 엘자의 보살핌으로 부상에서 회복되자 둘은 다시 떠나야 한다. 마레샬이 차마 자기 입으로 그 얘기를 못하는데 로젠탈이 대신 말하자 그녀는 울기 시작한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던 그녀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다며 짧지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엘자에게 "전쟁이 끝나면 내가 죽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와 롯테와 함께 프랑스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마레샬!

 사실 철석같은 약속을 하기엔 오히려 그녀에게 또다른 마음의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전쟁 상황이다. 롯테에게 키스해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마레샬. 그는 로젠탈에게 "그러면 못 떠날 것 같아서…"라고 실토한다.

 지도와 계곡을 번갈아 보며 "분명히 만들었을 텐데 국경이 보이지 않아. 그래서 기준으로 삼을 게 없어"라고 투덜거리는 로젠탈. "어딘가에 표시가 있으면 좋은데. 그래야 엘자한테 돌아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마레샬.

 드디어 수색하던 독일군이 눈 덮인 계곡을 지나가는 두 탈영병을 발견하고 몇 발의 총을 쏜다. 그러나 곧 지휘관이 사격을 중지시킨다. 왜냐하면 둘은 이미 스위스 국경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크레인샷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어디에도 국경의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국경은 인간이 만든 보이지 않는 개념일 뿐일진대 땅따먹기처럼 전쟁을 일삼는 인간들! 영화는 그들의 미래는 불확실한 채 끝을 맺는다.

 장 르누아르 감독은, 전쟁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보다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며,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모두 환상(That's all an illusion)"이라고 역설한다.

 '거대한 환상'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는 달리 전투장면이 없다. 아예 전쟁 자체를 '무용지물의 연습'이라고 생각한 르누아르 감독은 많은 국적의 군인들이 공통의 경험을 하는 '포로수용소'라는 공간을 통해 정치적, 역사적 주제, 사회 계급과 지위, 인종 차별 등의 세계를 갈라놓는 여러 경계선(편견) 그리고 전쟁에 대한 반전 메시지 등을 부정(否定)의 부정이라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마지막에 나오는 독일 여성 엘자의 집이 그 해답이 아닐까 싶다. 국적도 신분도 계급, 지위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꿈의 공간인 아이와 엄마, 그리고 아빠라는 가족! 전쟁이라는 거대한 환상은 끝이 났고 이젠 가족이라는 환상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일만 남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래도 전쟁은 돌고 도는 '거대한 환상'인가?

 장 가뱅(Jean Gabin, 1904~1976)은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망향(Pepe le Moko·1937)', 에밀 졸라 원작의 비극인 '인간 야수(The Human Beast·1938)'에서 그 진가를 인정 받아, 마침내 1938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시적인 사실주의 영화 '안개낀 부두(The Port of Shadows)'를 통해 명배우로 발돋움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체기를 맞이했으나 1954년 자크 베케르 감독의 '현금에 손대지 마라'로 재기에 성공하여 알랭 들롱과 공연한 '지하실의 멜로디(1962)' '시실리안(1969)' 그리고 '암흑가의 두 사람(1973)'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전설적인 프랑스 배우.

 로젠탈 중위 역의 마르셀 달리오(Marcel Dalio, 1899~1983)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또 다른 작품 '게임의 규칙(1939)'에 출연하였으며, '카사블랑카(1942)'에서 카지노 딜러 에밀 역 및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 1944)'에서 레지스탕스를 돕는 호텔소유자 제라르 역으로 험프리 보가트와 공연한 프랑스 배우.

 라우펜슈타인 역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1885~1957)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1909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영화감독, 배우 및 제작자. 그가 감독한 영화 중 세 편, 즉 '어리석은 아낙네들(1922)' '탐욕(1924)' '웨딩 마치(1928)'를 비롯하여 배우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선셋 블러버드(1950)' 등 5편이 미국의회도서관 소속 국립영화등기소에 등록되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완벽주의자였던 슈트로하임이 무성영화 '탐욕(Greed)'을 만들었을 때 원래 무려 8시간짜리 대서사시적 걸작이었는데 MGM에서 흥행실패를 우려해 140분으로 가위질 당하는 비운의 수모를 겪었다. 현재 249분짜리 복원판이 출시되었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 작곡가 조셉 코스마(Joseph Kosma, 1905~1969). 그의 이름은 몰라도 '고엽(枯葉·Autumn Leaves)'은 기억하실 것이다.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1946)'에서 이브 몽탕이 불러 일약 유명해진 이 곡의 작곡가다. (끝)

 

▲ 두 사람은 엘자(디타 파를로)의 딸 롯테(리틀 피터스)를 위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을 선물하여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 이별을 아쉬워하는 엘자에게 "전쟁이 끝나면 내가 죽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와 롯테와 함께 프랑스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마레샬(장 가뱅).

 

▲ 지도와 계곡을 번갈아 보며 "국경이 보이지 않아 기준으로 삼을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로젠탈. 국경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개념에 불과하다.

 

▲ (왼쪽 사진) 눈 덮힌 계곡을 지나가는 두 탈영병을 발견하고 총을 쏘는 독일군. 그러나 곧 지휘관이 사격을 중지시킨다. 둘은 이미 스위스 국경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카메라가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크레인샷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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