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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I 배경 영화(II)-"무기여 잘 있거라"(하)

 

(지난 호에 이어)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 스위스 경찰인 치메르만(에두아르트 링커스)이 찾아와 검문을 한다. 헨리가 자기는 미국인 작가이고, 보트타기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이며, 사촌인 바클리 양은 영국인 미술가로 똑같은 스포츠광이어서 이탈리아에서 여기까지 밤새 왔노라고 말하자, 그는 대뜸 소지한 돈이 얼마냐고 묻는다. 2만5천 리라라고 대답하자 여행객으로 생각한 치메르만은 반색을 하며 오히려 자기 어머니(요한나 호퍼)가 경영하는 호텔을 추천하는 게 아닌가.

 

 닥터 에머리히(오스카 호몰카)가 호텔로 왕진을 와서 진찰을 한다. 그는 산일(産日)이 6주 앞으로 다가왔다며 모든 상태가 건강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헨리의 무릎은 괜찮지만 조심은 해야 한다며 봄이 되면 아빠가 될 것이라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헨리가 이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자 이 뚱뚱한 모습으로 하긴 싫고 몸이 날씬해질 봄에 오렌지 꽃이 필 때 오르간 음악에 묻혀 하겠다고 대꾸하는 캐서린. 스위스의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오로지 아이의 출산만 기다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두 사람….

 

 마담 치메르만이 저녁 간식을 갖고 방으로 온다. 남자에겐 맥주와 프레첼이, 여자에겐 따뜻한 와인과 안주가 좋다며 아들을 사촌이라고 잘못 소개했다며 겸연쩍어 하는 마담.

 

 1918년 새해를 맞이하는 두 사람은 와인잔을 부딪치며 '리틀 캐서린'을 포함한 세 명의 안녕을 빈다. 캐서린은 헨리에게 자신은 배가 불러 꿔다놓은 보릿자루이니 재미없을 거라며 내일 읍내에 가면 '젊고 예쁜 게이'하고 놀아라며 자기는 새해 첫날 애기 옷을 사겠다고 웃으며 말한다. [註: 여기서 '게이(gay)'라는 말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20세기 최고의 미남배우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던 록 허드슨(Rock Hudson, 1925~1985)은 1950~60년대 최절정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1985년 60살 나이에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있는데 진통이 온다. 병원으로 실려간 캐서린은 심한 뇌우(雷雨)가 치는 날 난산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남자아이를 분만하지만 사산(死産)이고, 좀 있다 헨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도 끝내 사망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저 세상으로 보낸 프레데릭 헨리에겐 모든 게 허무할 뿐이다. 충격에 휩싸인 그는 비가 내리는 텅빈 거리로 쓸쓸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가 점점 멀어지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여기서 이 1957년 작품을 1932년 영화와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마지막 장면이지 싶다. 1932년 작품에서는 캐서린이 있는 곳을 알려준 사람은 퍼거슨 간호사가 아닌 리날디 소령이다. 그는 친구 헨리 중위를 러브스캔들에서 구제하기 위해 그동안 캐서린이 보낸 편지를 반송 처리했고, 그 일에 자책감을 느껴 숨어있는 헨리를 찾아가 그녀가 있는 곳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그는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때 임신한 캐서린은 군 규율을 피해 이미 스위스 '브리사고(Brissago, 마죠레 호수 서안 호반도시)'에 망명해 있었고, 헨리는 리날디의 도움으로 보트를 타고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리고 그가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캐서린은 이미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그녀가 죽던 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에 평화협정이 발표된다.

 

 아무튼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David O. Selznick, 1902~1965)은 이 영화를 통해 아마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위대한 전성기를 또한번 구가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혹평을 받았으며, 이를 마지막으로 그는 영화계를 떠나 다시는 손대지 않았다. 혹평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풋풋한 처녀 간호사 캐서린 역에 당시 38살의 그의 부인 제니퍼 존스를 캐스팅 한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리날디 역의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사요나라'의 레드 버튼스에게 돌아갔다.

 

 데 시카는 감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적 작품은 '구두닦이(1946)' '자전거 도둑(1948)' 소피아 로렌 주연의 '두 여인(1960)' 및 '어제, 오늘, 내일(1963)' '연인들의 장소(1968)' '해바라기(1970)' 등이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 '여로(The Voyage·1974)'였다.

 

 찰스 비더(Charles Vidor, 1900~1959) 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에 출정한 후 192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다 1929년 사비(私費)로 만든 단편영화 'The Bridge'로 유니버설사에 고용되어 영화와 인연을 맺는다.

 

 1932년에 감독 데뷔하여 리타 헤이워즈 주연의 '커버 걸(1944)' '길다(Gilda·1946)' 및 '카르멘(The Loves of Carmen·1948)' 등을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콜롬비아 사장 해리 콘과 소송까지 가는 마찰을 빚어 1950년에야 계약 옵션에서 벗어나 비로소 프리랜서가 된다. 그 후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랩소디(1954)', 미국의 전설적 가수이자 배우인 루스 에팅의 자전적 영화인 '정욕의 악마(1955)', 그레이스 켈리의 마지막 영화인 '백조(1956)', '무기여 잘 있거라(1957)' 등으로 흥행 성공을 이어간다.

 

 그러나 1959년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를 그린 '나의 사랑은 끝나다(Song Without End)' 촬영 3주차에 심장마비로 비엔나에서 58세로 사망하여 그의 유작이 됐다. 조지 쿠커 감독이 이어받아 다음해에 완성, 개봉했다.

 

 찰스 비더는 그의 장인인 워너 브라더즈 사장 해리 워너와 같은 LA '평화의 집 묘지'에 안장됐다. 그가 1945년 재혼한 부인 도리스 워너(1912~1978)는 머빈 르로이 감독에 이어 세 번째 결혼이었다.

 

 음악감독 마리오 나심베네(Mario Nascimbene, 1913~2002)는 6세기에 걸쳐 150여 곡의 영화음악을 만든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 거장 작곡가이다. 특히 Jew's Harp, 하모니카, 심지어 일상의 소음, 예컨대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 자전거 벨소리, 타자기 치는 소리 등을 오케스트라와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당시 '혁명적인 혁신'의 음악을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맨발의 백작부인(1954)' '알렉산더 대왕(1956)' '무기여 잘 있거라(1957)' '바이킹(1958)' '솔로몬과 시바(1959)' '바라바(1961)' 등의 OST 음악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이탈리아 저명 음악가인 프랑코 페라라(Franco Ferrara, 1911~1985)가 직접 지휘했다.

 

 특히 1961년 발레리오 주르리니 감독의 '가방을 든 여인'에서 클래식과 영화 음악을 비롯하여 칸초네, 팝송, 재즈,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트위스트 곡에 이르기까지 1960년대의 향수를 물씬 불러일으키는 16곡의 주옥같은 노래로 드라마의 분위기에 따라 절묘하게 감정 이입(移入)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끝)

 

▲ 탈영하여 드디어 사랑하는 캐서린의 품에 안기는 프레데릭 헨리. 그녀는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위로한다.

 

▲ 이탈리아-스위스 국경에 있는 슈트레사 호반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카라비니에리 헌병들 때문에 불안하기만 하다.

 

▲ 야간에 마죠레 호수에서 스위스를 향해 보트로 탈출하던 중 순시선의 감시를 피해 갈대밭에 숨는 두 사람.

 

▲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 스위스 경찰인 치메르만(에두아르트 링커스)이 찾아와 검문을 하는데…

 

▲ 스위스의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오로지 아이의 출산만 기다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두 사람…

 

▲ 캐서린은 제왕절개 수술을 받지만 아이도 죽고, 헨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도 끝내 사망한다. 허무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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