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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24)

 

(지난 호에 이어)

 배급소 근처에 다 다르니 어떤 사람들은 구루마에 쌀을 넘치게 싣고 가는 것이 보였다. “좀 전에는 어떤 사람들은 서너 달치를 한가득 타 가는 걸 봤는데 아마도 빽 있는 사람들만 그렇게 주는 건가?”

 그런데 내가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몇 달치씩 타고 가는 아줌마들이 많았다. 간부들에게만 몇 달 배급을 주고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달랑 보름치만 준다고 한다. 배급소 앞에는 피난민들처럼 쌀자루를 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기다렸지만 오후쯤에야 배급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배급카드를 내밀면 내가 받아야 할 식량 이름과 수량을 적어준다. 그날은 국수, 백미, 옥수수쌀을 몇%씩 계산해 배급카드를 주었다. 그 카드를 가지고 쌀 창고에 가야 쌀을 준다.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몇 달 밀린 배급을 받을 수가 있는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순간 번뜩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얼른 배급카드를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 식구가 탈 수 있는 쌀 수량에 국수, 옥수수쌀, 백미 등등을 퍼센트로 따져보았다. 그리고 그 밑에 2달치 양을 더 적어 넣었다. 보름이라고 하지만 월말에 31일이 끼어 있으면 16일치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쌀 창고로 갔다.

 아버지 이름을 부르자 나는 얼른 쌀자루를 펼쳤다. 한창 쌀을 주던 창고 아줌마는 쌀을 주다가 갑자기 멈췄다. “가만있자! 너네는 왜 이렇게 타가는 쌀이 많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됐는지 그는 내 카드를 유심이 쳐다보더니 들고 출납소에 갔다. 우리집은 간부집이 아니라서 배급을 몇 달씩 탈 대상이 못 된다는 것을 그 아줌마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끝장이다! 고 생각한 순간 두려웠고 모든 일이 들키게 되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출납소에서는 내가 두 달 쌀을 더 적어 넣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들 경악했다. 그들이 경악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적은 모든 수량과 퍼센트가 정확했고 조금도 오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출납아줌마는 나한테 따져 물었다.

 “너 이 계산을 누가 해 준 거니? 이건 분명 누군가가 계산해준 거야. 너 혼자 절대 계산할 수 없어. 누구랑 짠 거야?” “그냥 나 혼자서 아줌마가 계산한 걸 보고 알아냈어요.”나는 몹시 두려워 겨우 대답했다. “뭐? 네가 혼자 한 거라고? 야~~참! 넌 정말 천재다. 그런데 나쁜 곳에 그런 좋은 머리를 쓰다니? 나~ 참 배급소 일을 30년 동안 하다가 이런 일은 처 음 본다. 와! 진짜 간도 크지. 대단하다 대단해…”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쌀을 훔친 것도 아니고 내 배급을 더 타 먹으려고 꼼수를 부렸다고 욕을 하는 것이다. 나는 결국 보름치만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한테 사실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욕먹을 일이 두려웠다. “엄마,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아마 낼 공장에 소문이 쫙 날 거야. 창피해서 어떡하지?” 나는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을 걱정했다. 하지만 엄마는 깜짝 놀라더니 뜻밖에도 나를 칭찬했다.

 “뭘 그런 걱정을 다 하니? 사람들은 너를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라 너의 그 비상한 머리와 용기와 배짱을 두고 부러워할 거다. 간부들은 몇 달 치씩 쌀을 타 가는데 노동자들 가족은 보름치만 주니까 그렇지. 평민과 간부들은 항상 불평등하잖아. 누구도 너를 비난하고 욕할 자격이 없어. 그나저나 넌 어떻게 계산한 거니?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도 모르겠어, 그냥 배급소 아줌마가 계산한 걸로 퍼센트를 계산해내서 두달치를 비슷하게 계산한 거야”

 사실 백미, 밀가루, 국수, 강냉이쌀 등 그때마다 종류가 다르고 계산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복잡한 계산을 할 생각도 못한다. 특히 밀가루나 국수는 손실이 많다고 떼는 게 더 많다. 그래서 어떻게 계산하는 것인지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공장에서는 순식간에 소문이 났다. 김00가 배급을 두 달치나 더 타려다가 발각됐다고 말이다.

 그런데 손가락질을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놀라워하며 감탄했다. “야~~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낼 수가 있지? 내 마누라는 왜 그런 생각조차 못하지? 걔는 어쩜 그런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참 대단하네.” 주변 사람들은 정말 혀를 끌끌 찼다. 남편은 다음날 초급당 비서한테 불려가서 마누라 교양을 좀 잘하라고 한 소리 듣고 왔다. 그리고 그는 그 화풀이를 나한테 했다.

 “너는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다 하니? 남들이 안 하는 짓만 골라서 해? 내가 체면이 뭐가 됐는지 알아? 창피해서 죽겠어.” 그는 사실 내가 하는 어떤 일도 다 불만이었다. 내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은 다들 나를 칭찬했다. “진짜 잘 했어. 당간부들은 서너 달치 쌀을 퍼주면서 평민들은 쌀 안주면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야 되니? 네가 국가의 쌀을 훔친 것도 아니고 타야 할 배급을 타려고 한 거잖아. 절대 기죽지마. 네가 오차 하나 없이 그 짧은 시간에 주판기도 없고 계산기도 없이 머리로 계산을 해냈다는 게 대단한 거야”

 만약 창고장 아줌마가 발견하지 못하면 그냥 그렇게 쌀을 탈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공장에 내 이름을 날리고 말았다.

 식량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어분사료로 양식을 바꾸는 일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갖다 바친 어분으로 받아야 할 강냉이가 거의 1톤 가까이 되는데도 돌려받지를 못했고 우리는 또다시 뭐라도 해야 살 수가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점점 부담이 더해지고 집 형편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보면서 남편과 따로 나가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평양 돌격대에서 돌아온 남편과 함께 동창생의 사랑채에 세를 들어 살기 시작했다. 6개월치를 내고 들었는데 내가 돈이 없으니 둘째 언니가 2500원이나 되는 6개월치 월세를 내주었다. 갓난아기를 업고 고생하는 내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때는 1996년 늦가을이었고 나는 26살이었다.

8. 집에 찾아온 번의 검은 그림자

 우리가 이사한 집은 조그만 방에 아기까지 세 명이 겨우 누울 정도였고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방이라 불을 때도 온돌에 온기가 없었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깔고 앉아있어야 했고 먹을 것은 물론, 땔나무, 하나부터 열까지 가지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남편은 매일같이 출근을 하지만 월급이나 배급은 바랄 수도 없고 나는 젖먹이 아기를 업고 아무런 돈벌이도 할 수가 없었다.

 결혼 전에는 가정을 이루면 부지런히 장사도 하고 돈을 벌어서 남 못지않게 잘살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 당장 세 식구의 입에 넣을 먹거리가 걱정이었다.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매일 가까운 친정집에 갔다. 그나마 그곳이 제일 아늑하고 따뜻했고 식구들은 아기를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아직 26살 젊은 새댁인 나는 어떻게 살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서 가정을 유지해 나갈지 아무런 궁리가 생기지 않았다.

 북한은 대부분 여자들이 돈을 벌거나 쌀을 마련하는 등 가정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산다. 나의 남편도 마찬가지이고 남의 집 여자들이 악착같이 살림하고 돈을 버는 데 나보고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한다. 나는 아기 때문에 내가 갈 수 없으니 그에게 혜산시로 쌀장사를 하러 갔다 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혜산이나 중국 가까운 지역들은 중국에서 쌀이 밀수로 들어오기 때문에 가격이 우리 고장보다는 싸다. 그래서 남자인 당신이 한번 갔다 오라고 했다.

 남편은 휴가를 받고 나의 큰언니네 집에 가서 돈 500원을 빌리고 도시락도 싸가지고 평양-혜산행 열차에 올랐는데 열차 칸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지붕을 타고 갔다고 한다. 사고가 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길 천만다행이다. 갔다 오는데 5일이 걸렸는데 500원을 가지고 옥수수 쌀 한 배낭을 (20kg)정 도 사 가지고 왔다. 처음 해보는 쌀장사라 남편을 고생했다고 칭찬을 해주고 장마당에 나가서 팔려고 하니 그새 쌀값이 내렸다.

 너무 많은 쌀이 우리 고장 장마당에 풀려서 혜산에선 쌀값이 오르고 여기선 오히려 내리는 바람에 거기나 여기나 쌀값이 같아졌다. 또 남편은 무게를 속아서 사 온 것도 문제였다. 저울로 장난을 쳐서 무게를 속이면 아무도 알 길이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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