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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15)

 

(지난 호에 이어)

 그렇게 엄마는 한평생 여자들이 겪는 모든 불편한 문제들을 다 안고 살아야 했으며 자식들과 직업까지 함께 병행하면서 정말 힘들게 살아오셨다. 만약 나라면 절대로 엄마처럼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버지는 쌍둥이로 태어나셨는데 쌍둥이 형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두 살 때 어머니가 산후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20살 더 많은 큰 형님과 형수님의 손에서 조카들과 함께 자랐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눈칫밥을 먹어야 했고 형수님의 구박에 정말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내왔다.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가사일에 전혀 소질 없는 엄마를 만나 평생 불만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엄마는 요리나 부엌살림을 정말 못했는데 그래서 따뜻한 된장국 한번 맛있게 먹어본 기억이 없다. 가사일은 우리 딸들이 번갈아가며 했다. 손님 밥상도 우리가 해서 올리고 엄마는 방안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다. 아버지께 제대로 된 음식 한번 대접해 드리지 못한 너무 미안한 마음은 탈북을 하고 나서부터 내 가슴 에 파고들었다.

 엄마는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알게 되신 것 같았다. 배급이 끊기고, 은행에 돈이 없어 저금해둔 돈도 찾아 쓰지 못하는 시절이 온 것이다. 한평생을 김정일 부자를 위해 바쳤는데 나라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는지를 뼈저리게 후회하셨다. 그리고 가끔 라디오에서 잡히는 남한 방송을 들은 사람들의 말을 몰래 전해듣고 서서히 위험한 발언들을 서슴지 않게 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김정일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심장마비 왔다, 김정일이 이붓 형제인 김평일을 밀어 내고 후계자가 되려고 김일성한테 아첨하려고 젊은 여자 애들 갖다 바쳤다, 김정일이 삼촌 김영주(김일성동생)를 지방에 보내 버렸다.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했다.”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르지만 정말 위험천만한 발언들이였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우리는 보위부 귀에 들어갈까봐 가슴 졸이며 제발 말조심 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엄마를 막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평양에서 정부 요직에 있던 사촌 오빠가 고모 입 단속을 위해 우리집에 찾아왔다. “제발 고모! 말 조심해주세요. 우리 가족들 다 멸살 되는 거 보고 싶어요?” 그때 엄마는 그 오빠에게 말했다. “이놈 자식. 넌 고모가 어떻게 사는지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가 이제 와서 니 목이 잘릴까봐 이 시국에 나 입다물라고 찾아왔니? 에라이, 나쁜 녀석!”

 엄마는 그에게 김정일이 얼마나 나쁘고 국가와 백성을 어떻게 지옥에 몰아 넣고 있는지 밤새 등잔불 밑에서 설명을 했고 엄마를 참 교육하려고 왔던 사촌오빠는 되려 엄마한테서 훈육을 받았다.

 그 와중에 사촌오빠는 남한 옷 몇 벌을 가져와서 팔아 달라고 부탁했다. 평양에서는 팔다가 잡히면 큰일난다면서 말이다. 옷에는 상표가 잘려져 있었는데 상표가 잘려진 것을 본 엄마는 바로 “이거 남조선 옷이네?” 알아맞혔다. 남조선 옷은 상표가 달려있으면 절대 못 팔게 한다. 그래서 상표를 없애 버리고 대만이나 홍콩 제품이라고 해서 팔아야 탈이 없다.

 엄마는 장사머리도 참 비상했다. 동네 사람들은 엄마가 교육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동네 최고 부자가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만큼 엄마는 장마당에 한번 둘러보면 바로 돈 버는 방법을 바로 생각해냈고 남들 생각에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집은 쌀이나 먹을 것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잘 살아서가 아니라 엄마가 잘 퍼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 식구들 모두 엄마가 자꾸 남을 퍼 준다고 몰아세웠지만 바닥에 누워서 굶어 죽어가는 이웃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식구들 몰래 음식을 감춰가지고 나가서 주기도 했고 촌수가 먼 친척들도 달려와서 식량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정도였다. 엄마 주변에는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손 내미는 사람들 뿐이었다.

 가정주부로서는 많이 부족한 엄마였지만 자식들에게는 무한한 열정과 헌신을 쏟아 부으셨다. 엄마는 정화수를 떠놓고 100일동안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해마다 빠짐없이 우리 자식들을 위해 100일 기도를 하셨다. 우리집에서 1시간가량 걸으면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이 있었는데 나도 엄마와 함께 자주 샘물을 길으러 갔었다. 엄마는 밤 11~1시사이에 꼭 일어나 물 한 그릇 올려 놓고 매일 밤 빌고 또 빌었다.

 내가 탈북 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7년 세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생사를 알 길 없는 이 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아들이 병을 고쳐달라고 하늘에 대고 기도를 했다. 한번은 엄마가 샘물을 길으러 어두운 밤길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손에 든 것 내놓소. 그게 뭐요?” “이건 그냥 물이요.” “물? 참 나. 거짓말을 하지 마오. 그거 술 아니오?” 당시 북한은 집집마다 술을 제조해서 팔고 사고했으므로 물통에 술을 담는 건 보통이었다.

 그는 엄마가 들고 있는 물통을 와락 뺏아서 그 더러운 입에 대고 마셨다. 그러다가 퉤퉤! 내뱉으며 “아, 이거! 정말 물이구만. 이런 미친 아낙네가 이 밤중에 왜 물을 들고 다녀?”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그 물을 와락 쏟아버리고 다시 샘터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시 길어온 물로 엄마는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행방을 알 수 없는 나를 위해 온갖 기도를 다하고 심지어 점 보러까지도 다닐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던 엄마한테 어느날 갑자기 같은 학교 동료 선생님이 찾아왔다. “선생님, 제가 어젯밤에 선생님 셋째딸 꿈을 꿔서 일부러 왔어요. 꿈에 셋째가 아이를 업고 돈이 꽉 찬 트렁크를 끌고 집에 돌아왔더군요. 아마 걔가 돈을 많이 벌고 돌아올 것 같네요.”

 그 말을 전해 들은 엄마는 갑자기 힘이 솟아나 내가 꼭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또 다른 신기가 있는 동료 선생님도 “걔는 절대 죽을 애가 아닙니다. 무조건 성공해서 돌아올 아이니 절대 걱정하지 마세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가 꼭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의 힘은 엄마를 그 모진 세월 동안 견딜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 되었다.

 나도 중국에서 살던 3년째 되는 해부터 그렇게 엄마가 소원을 빌던 생각이 떠올라 부모형제들을 위해 백날 기도를 했다.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11월부터 2월 중순까지 추운 겨울에 앞마당에서 길어온 샘물과 촛불을 켜 놓고 부디 부모 형제들이 굶어 죽지 않고 꼭 살아있게 달라고, 꼭 고향에 가서 부모님과 남동생을 데려오게 해달라고, 돈을 많이 벌어서 도와주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소원을 빌었다. 당시 내가 부모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밖에 없었다.

 바다 건너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이역땅에서 엄마와 딸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그리움과 애환을 주고 받았다. 엄마는 바람에 대문 소리만 들려도 내가 온 줄 알고 달려 나갔고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그만 죽은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 눈 감으시면서 “이제 저세상에 가면 드디어 셋째를 만날 수 있겠네.”라고 하셨다고 한다. 만약 내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엄마는 좀 더 오래 살아 계셨을 것이다. 엄마가 나를 기다리다 더 일찍이 돌아가신 것 같은 자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엄마의 기도를 하늘도 알아들은 것인가? 언젠가부터 꼬이기만 하던 내 일은 잘 풀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비록 음식이나 육아, 살림에 대해 엄마한테서 배운 것은 없지만 곤경이나 난관 앞에서 굴하지 않고 뚫고 나갈 수 있는 정신적 힘이라는 유산을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아직까지 엄마처럼 천재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 위대한 인물은 단연코 나의 엄마이다. 그는 나의 학교 스승이었고 또 내 인생의 스승이고 내 영혼의 길잡이이다.

 그렇게 영원히 살아 계실 것만 같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큰 기둥이 뽑힌 것처럼 가슴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때에는 충격에 휩싸여 며칠을 슬픔에 잠겨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지금은 부모님과 남동생이 같은 곳에 함께 묻혀 있다. 나는 그들이 천국에서 더 이상 춥고 배고프고 아프지 말고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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