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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소리

 

 나는 초등학교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면소재지에 있는 ‘예안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나무로 지은 전형적인 학교 건물, 교실 뒤로는 절벽같이 가파른 선성산이 버티고 있고 가을이면 선성산 단풍잎이 교실 벽에 쌓이는 학교. 교문에서 2, 3분만 걸어가면 둑을 따라 바로 발밑을 지나 저멀리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줄기가 훤히 보이는 그런 풍광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책 읽고, 노래 부르고, 공차고, 싸움박질 하고, 학예회 하고 청군 백군 나뉘어 운동회를 벌이곤 했지요. 명색이 면소재지라서 근처에 있던 여러 마을에 비하면 예안면 소재지는 그야말로 ‘대도시’ 였습니다. 한 학년에 학급이 2개나 되니 엄청나게 큰 학교가 아닙니까? 그때는 모든 것이 단순하고, 복잡한 것이라고는 눈에 띄지도 않던 시절, 한 번 같은 반 아이가 되면 6년을 같이 다니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졸업생 거의 전부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졸업식도 ‘이제 헤어지는구나’ 하는 석별의 감회는 지금과 비교해 몇 배가 더 컸던 거 같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의 광경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합니다. 그때 졸업식은 지극히 엄숙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장례식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졸업식은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시고 졸업장 수여, 재학생 대표의 송별사,  졸업생을 대표한 학생의 고별사(valedictory)가 있고 이어서 졸업식 노래가 있었습니다.

 졸업식 노래는 그날 행사의 클라이맥스였지요. 당시 우리가 불렀던 졸업식 노래는  아동문학가 윤석중이 노랫말을 쓰고 정순철이 멜로디를 단 ‘졸업식 노래’였습니다. 모두 3절로 짜인 이 노래의 노랫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럽기에 그 전부를 여기 적어 보겠습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보시다시피 어려운 낱말 하나, 애교(愛校)니 애국(愛國)이니 하는 형식적으로 내뱉는 말 한마디 없는, 그야말로 수정같이 맑은, 순도 100%의 우리말이지요. 그 시절은 선생님이 나와 손수 풍금을 치고 우리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1절은 재학생들이, 2절은 졸업생들이, 3절은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 불러서 석별(惜別)의 애틋한 분위기를 돋웠습니다. 노래의 멜로디가 얼마나 애달픈지 2절을 부를 때면 교실 저쪽에서 가시나(우리 사내아들은 여학생들을 이렇게 불렀지요)들이 훌쩍훌쩍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국 E여대에 가 있을 때 은퇴가 가까워져오는 어느 이른 봄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12살, 초등학교 졸업식 때 노래를 부르던 그 정서에 또 한 번 젖어 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졸업한 국민학교와 비슷한 산골학교의 졸업식에 가보리라는 생각을 했지요(내가 졸업한 예안국민학교는 수몰지구라 폐교되었습니다). 이래서 낙착된 곳이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온혜초등학교 졸업식이었습니다.

 온혜초등학교는 노송정(老松亭) 종갓집에 퇴계(退溪) 이황이 태어난 태실(胎室)이 있는 마을로 내가 졸업한 예안국민학교와 잘 비교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졸업식 전날 안동에 가서 시내 여관에 묵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온혜초등학교에 가서 식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의 엄숙하고 애잔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졸업식 노래’도 사람이 나와서 피아노와 풍금을 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단추 하나만 누르면 애국가든 졸업식 노래든 ‘독도는 우리 땅’이든 무슨 노래든 척척 나오는 그런 최신식 CD 졸업식이었습니다. 행사의 흥취랄까 멋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요. 12명의 졸업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킬킬대며, 저들끼리 귀엣말을 해가며 작별의 정서는 그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후 한 번 젖어보리라 꿈꾸었던 정서는 어딜가고 우리 부부는 큰 허탈감에 빠졌습니다(이걸 보려고 그 먼 길을 왔나?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내가 68년 전의 감회 어쩌고 한 것은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이 되고 말았지요.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옛날, 그 옛날, 어느 봄 예안국민학교  교정에 울려 퍼지던 그 풍금소리와 그날의 애잔한 작별의 정서뿐입니다. (20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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