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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

 

 



 제트기가 태평양 바다 위를 날고 전자우편이 몇 초 사이에 대륙을 왔다갔다 하는 이 과학문명 시대에 무슨 죽은 지가 1,800년이 가까워오는 제갈공명이냐고 뜨악해하는 사람들이 많을게다. 제갈공명은 우리가 어려서 읽은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귀신도 부리는 병법의 귀재로만 알 뿐이지 그가 실제 인물이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나는 언제고 실존 인물로서의 제갈공명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의 뛰어난 지략과 인간성은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제갈공명으로 알려진 사람의 제갈(諸葛)은 성이요, 공명은 자(字), 이름은 량(亮)으로 181년 한(漢)나라 영제 때 지금의 산동성, 낭야군의 지방관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몸을 의탁했던 숙부가 죽자 융중이란 곳에서 초가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며 살았다.


 207년 훗날 촉(蜀)을 세운 47살 유비가 27살 공명을 세 차례 방문, 유비의 초빙에 응하여 그를 도와 천하통일의 대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군사 장군, 승상 등의 크고 중요한 벼슬은 다 지냈으며 234년 12월8일 통일의 대업은 이루지 못한 채 오장원 싸움터에서 지병이 악화되어 54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위에 적은 것만으로 보면 제갈량은 어느 평범하고 유능한 정치가나 장군에 지나지 않는다.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을 잊지 못하는 것은 천하의 온갖 이치를 꿰뚫는 총명함과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비범한 책략은 물론 그가 유비 진영에 가담하고 나서부터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변함없는 충성심, 공명정대하며 검소한 자세와 부지런히 노력 실천하는 모습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서남지역의 카와족 사이에서는 제갈량이 자기들의 선조들에게 집 짓는 기술과 대바구니 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병이 들어 임종석에 눕게 된 54살의 유비는 제갈량을 불러 “내 자식 선은 노둔하기 짝이 없는 아이요, 만약 보좌할만 하거든 보좌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게 하고 그렇치 않거든 그대가 나라를 차지하십시요”라는 요지의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어리석기로 이름난 새 군주 유선 밑에서 제갈량은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어린 군주를 보좌했다. 


 227년 제갈량은 전군을 이끌고 북쪽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출정에 앞서 그는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라는 그의 충정을 쏟아 부은 장문의 의견서를 바쳤다. 천하명문인 이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 나올 정도록 읽은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글이다.


 동양의 수필은 일반적으로 자기 신상에 대한 고백을 좋아하는데 공명의 출사표나 최남선의 독립선언문 같은 글은 이런 범주에 들어가는 글은 아니지만 워낙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글이라 수필 범주에 넣는 사람도 있다.


 “선제 창업이 반도 못되어 중도에 붕조하시고 천하는 삼분되고(촉, 오, 위) 익주는 피폐하니 참으로 위급 존망이로소이다.  ….신은 본래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남양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지러운 세상에 목숨을 보전하려고 했을 뿐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쫓아 일신의 영달을 꾀할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선제께오서 신의 비천함을 탓하지 아니 하옵시고 높으신 몸을 굽히어 세 차례나 거듭 신의 거처를 찾아오셔서 당세의 시무를 물으셨습니다. 신은 여기에 감격하여 선제를 위하여 일신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읽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눈물 없이는 읽어 내려가기가 힘든 충정과 절개가 곳곳에 엿보인다. 인간 역사를 살펴보면 자기 군주가 살아있을 때는 충성을 맹세하다가도 군주가 죽거나 권력에서 밀려나면 바로 그 이튿날로 뒤돌아서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제갈량처럼 본래 주인은 가고 명민하지 못한 새 주인이 들어섰는데도 끝까지 충성을 다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촉과 싸우던 위(魏)가 그렇다. 위를 세운 조조가 죽고 난 후 사마의의 세력이 날로 커져갔다. 그런데 이 사마의는 제갈공명과는 달리 처음부터 위나라 신하로서 위나라의 왕위를 빼앗을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를 깊이 숨기고 그의 아들들과 거짓 충성하고 거짓 복종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가. 결국 위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사마의와 그의 아들들이었다. 이에 반해 제갈량의 충성에는 한 점의 불순물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충성심이니 절개니 하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충성심이란 말과 가장 가까운 현대어는 정성과 신의라고 볼 수 있다. 정성과 신의는 현대 사회생활 어느 구석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덕목이 아닌가. 제갈량의 정치는 사심이 없이 공평하였다. 예로 자기 측근에 마속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런데 마속이 북벌 때 제갈량의 작전 명령을 어겨 전략상의 요충지를 잃게 되자 군법의 존엄성을 보이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처형하였다.


 고등학교 국어 고문(古文)시간 ‘두시언해’를 배울 때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을 찾아 지은 ‘촉상’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으리오/ 금관성 밖 잣나무가 울울한데로다/ 세 번씩이나 찾은 것은 천하를 위해서요/ 두 왕(유비, 유선)을 섬긴 노신(老臣)의 충성스런 마음이라/ 군사를 출동시켜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을 적시게 하누나(?相祠堂何處尋…長使英雄淚滿襟)”


 오수형이 편역한 ‘제갈공명: 난세를 건너는 법’을 보면 제갈량은 병이 심해지자 묘지의 선택과 장례 등 사후의 일을 일일이 지시하며 검소하게 치를 것을 부탁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는 유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제가 전에 선제를 모실 생활 비용을 국가에 의존했었으므로 제 나름의 다른 조치는 없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성도에 뽕나무 팔백 그루가 있고 척박한 땅이나마 열다섯 경(頃)이 있으니 자식의 의식을 해결하기에는 넉넉합니다. 따로 수입이나 지출없이 입고 먹고 의식 문제를 모두 국가에 의존하면서 별 달리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사오니…”


 1,7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오늘날 한국의 고등관리 중에 제갈량을 닮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신문 방송을 통해서 보면 없다. 모두가 탐관오리요 도둑놈 같아 보인다.

모두가 자기 재산 긁어모으기에 정신이 없고 이름 낼 기회라도 있으면 그 어떤 전향이라도 서슴지 않을 무리들… 이들은 제갈량 같은 좋은 본보기를 두고도 그 무엇을 찾으려는지 성경을 뒤지고 찬송가를 부르고 불경을 외운다.


 한자 문화권인 동양인에게 공명은 지혜의 상징, 충성스런 신하의 표상이다. 그의 이상은 원대하였고 실천은 근면하였다. 갈수록 황폐해가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제갈량이라는 이름 석 자가 흠모와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본보기가 될만한 좋은 지도자가 없는 현실 때문인가?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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