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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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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15)-잉카왕국이 탄생한 티티카카 호수

 

 

 잉카제국의 건국설화가 깃든 뿌노(Puno)의 티티카카 호수에서 21세기가 열리는 첫날 용머리 콘티카를 탄 일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리 부부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는 행운이었다. 페루 여행이라기보다 페루모험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리마에 묵던 날을 빼고는 이날 단 하루만 햇빛의 은총을 입었기에 더욱 그랬다. 

잉카 왕국은 꿈의 도시로 이젠 완전히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잃어버린 왕국으로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부터 끊임없는 탐험과 발굴 끝에 놀랍고 큰 산 마추피추를 비롯하여 많은 고적들이 신비의 베일을 서서히 벗어가고 있다. 

 페루 최초의 왕국은 꼬스코 왕국으로 여러 가지 건국설화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티티카카 호수 한가운데서 솟아난 태양신 잉티(Inti)가 사람으로 육화하여 꼬스코를 정착지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잉카의 후예들은 ‘티티카카에서 태양이 떠오르게 하는 조물주는 비라코챠’라고 믿고 있다. 

비라코챠는 망코카팍과 마마오꾜를 진흙으로 빚어 최초의 부부로 맺어준다. 망코카팍은 농사와 통치의 제왕이 되며, 마마오꾜는 길쌈의 시조가 된다. 그들이 제1왕국의 제왕이다. 제2왕국부터는 잉카라는 군주계급의 제왕이 탄생한다. 그 잉카들 중에 용맹과 지식이 뛰어난 전설적인 인물 파챠쿠티가 잉카제국을 건설하여 4대를 잇는다. 

황금으로 도배를 했던 영특한 파챠쿠티의 잉카제국도 132년 만에 세습제의 막을 내린다. 히스파냐(스페인)의 정복이 있기 전부터 제국 내부의 갈등으로 5년 동안 내전을 벌이는 동안 이미 파나마에 정착한 히스파냐인들과 피사로 장군에게 정복당하는 비참한 역사를 맞았다. 

가뜩이나 흉흉한 그 시기에 천연두가 돌아 면역이 전혀 없던 원주민들이 단기간에 수 만 명의 생명을 잃었다. 그들의 신 잉티가 용렬한 마지막 황제 아따왈파를 응징하기 위해 ‘얼굴이 하얀 신’으로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준다는 소문이 돈다. 드디어 스페인의 피사로 장군이 100여 명의 얼굴 하얀 신들(스페인 군사)을 데리고 나타나자 위대한 건축술과 예술과 농경의 땅 잉카제국은 조용히 그리고 빨리 사라져 버렸다. 

 이런 서글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해발 4천 미터의 티티카카 호수는 금방이라도 잉티가 물 한가운데서 떠오를 듯 푸른 정적이 감돌았다. ‘해 뜨는 쪽에서도 야훼께 영광을 돌려라. 바다 쪽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여라’고 선지자 이사야가 외친 곳이 이곳이 아닐까 할 정도로 그 신비함을 잃지 않고 있다. 

 

 

 티티카카에 인접해 있고 퓨마가 용을 쓰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타킬레 섬의 만만치 않은 지형이 나를 괴롭혔다. 호수 한가운데에 장난감 배와 같은 콘티키를 타고 우로인과 쾌챠인이 섞여 사는 ‘떠 있는 섬’에 내려, 갈대 짚으로 만든 섬 위에 세운 학교와 시장과 짚으로 만든 망대, 특히 고대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솔라하우스(태양열 집)들을 구경할 때만 해도 내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그런데 바다같이 넓은 이 호숫가에서 퓨마 닮았다는 타킬레 산정을 오르는 일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인왕산도 못 올라본 나는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높은 데를 끌고 올라온 안내인이 미친 모양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되돌아 내려갈 수도 없었다. 박물관 구경과 점심식사는 산꼭대기에 준비됐고 우리가 타고 온 배는 이미 반대방향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쉬엄쉬엄 제일 늦게 식당에 들어서자 일행들이 박수를 보낸다. 나는 화가 나서 밥 대신 맥주나 마시겠다고 했더니, 일행들이 한 목소리로 ‘No!’하는 것이었다. 4천 미터 이상의 이 높은 고지에서 맥주는 더 어지럽다며 코카인 차를 마셔야 한다고 우긴다. 

‘한국인도 아닌데 왜 이리 참견이람!’하면서 내 체질엔 ‘배고픔과 피로를 잊게 해준다는 흥분제’ 코카인보다는 잉카맥주가가 낫다고 오기를 부리며 맥주를 마셨다. 덕분에 호수로 내려가는 560개의 계단은 힘 안 들이고 내려갈 수 있었다. 다리에 알이 배길 지경이지만 백두산도 오를 수 있겠다는 각오를 이 산소결핍의 산정에서 다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만용인지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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