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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곤 칼럼

    김병곤
    (하버드대 보건학 석사, 컬럼비아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졸업(치의학 박사), MIT 공학석사, UC 버클리대학교 학사. 현재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아이비치과’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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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성추행 피해로 자녀가 학업에 집중을 못 합니다”

 

 오랜만에 지면에서 다시 뵙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몇 달 전에  한 독자분이 저에게 주셨던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해 드립니다. 현재 대학생인 자녀가 과거 성추행에서 받은 피해로 인해 학업에 집중을 못 해서 걱정이라는 어느 학부모님의 가슴 아픈 고민이셨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사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시 업무상 바빴던 관계로 죄송하게도 답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제 삶에 잠시 여유가 생겨서, 뒤늦게 이 사연에 대해 독자분과 현재 성인인 자녀분에게 익명을 전제로 동의를 구해 이번 칼럼에서 제 의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가 주제넘게, 저보다 자식을 훨씬 더 오래 키워 보신 독자분에게 감히 조언을 드려보겠습니다.

 

 첫째, 과거 성추행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녀가 학업에 집중을 못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하셨던 바로 그 부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업도 아니고, 집중력을 잃은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유일한 큰 문제는 과거 성추행의 피해로 자녀분이 아직도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부분에 대한 문제해결이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 트라우마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졌을 수는 있겠지만, 수치와 통계상으로 보았을 때 자녀분의 학업 성적 자체는 피해 당시 잠깐만 하락했으며, 그 이후에는 오히려 그 피해를 보기 이전보다도 더 높은 성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업 성적 자체가 전혀 아닙니다.

 

 자녀분이 안 좋았던 경험으로부터 오는 트라우마에 굴하지 않고 이에 맞서 용기 있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우리를 더욱 더 강하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That which does not kill us, makes us stronger”). 자녀분이 바로 그런 케이스입니다.

 

 셋째, 나쁜 사람으로부터 억울하게 피해를 보았을 때, 그 트라우마를 최대한 치유하는 방법은 단 한 개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합니다.

 

1)당신이 그 피해로 인해서, 세상의 객관적인 잣대로만 보았을 때는 오히려 더 성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2)그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법적 정의를 구현해야 합니다.

 

 자녀분은 놀라운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보여주고 있고, 학업 성적까지 오히려 향상되면서 1번 조건을 충족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2번 조건이 아직 충족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가해자는 형사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판결문을 읽어본 결과, 재판부는 여러 정황상 성추행을 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가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도 있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가해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고, 오히려 피해자만 계속해서 큰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독자분은 용서를 통한 마음의 치유를 말씀하셨는데, 이런 객관적으로 나쁜 사람한테서 큰 피해를 본 경우에는, 이를 용서하는 것도 좋은 길이 아닙니다.

 

 넷째, 적법한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차원적인 복수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성추행을 당한 것은 적어도 캐나다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연을 들어보니, 독자분이 걱정하시는 것과는 오히려 반대로, 현재 자녀분은 이 문제를 그냥 과거의 안 좋았던 일로 덮어두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녀분은 이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오히려 선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의 정점에는 바로 공개적인 민사소송(civil litigation) 및 언론의 자유가 있습니다. 현재 자녀분의 나이와 정신적 회복 탄력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자녀분은 이 소송을 함께, 그리고 길게 진행하실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영리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가족분들도 그런 소송을 함께 진행할만한 시간적,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인 여유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형사소송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려면 어떠한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도 없어야(“Beyond reasonable doubt”) 하지만, 민사소송은 그렇지 않습니다. 민사소송은 잘못했을 확률이 잘못하지 않았을 확률보다 단지 더 높기만 하면(“Preponderance of the evidence”) 이깁니다. 즉, 피고가 잘못했을 확률이 50%만 넘으면 원고가 승소합니다.

 

 당시 사건은 형사재판부가 판결문에서도 피고가 성추행을 했을 것으로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일부 물증과 목격자의 진술, 그리고 여러 정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케이스라면 민사소송에서는 승소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다 하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자녀분의 억울함이 어느 정도 풀리고 마음의 상처도 일부 치유될 수 있다고 감히 말씀드려 봅니다.

 

 물론 제가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복잡하고, 무거운 문제이기에, 시간을 어느 정도 더 두고 자녀분과 함께 고민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고민을 시작해 보실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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