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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울다가 웃고 사는 사나이


▲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아내(황옥경씨·왼쪽)와 필자


 서울시청 앞 광장 지하철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요란한 기계 소리를 들으며 김포공항을 떠났다. “얘들아, 뛰지 마라. 배 꺼질라.” 동요를 부르던 시절, 하루 한끼는 분식이어야 하고 점심 도시락은 잡곡밥이어야 했을 때였다. 나의 일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외국에서 버는 달라($)는 모국에 송금하여 외환 보유에 일조하겠다는 일말의 애국심도 있음이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떼로 몰려와 배웅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면서도 양담배 양주 실컷 피우고 마시게 되어 좋겠다고 웃기는 그들을 뒤로 하고 우리 가족은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인 이민자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한국인이 많이 다니는 C.C.M(스케이트 혹은 자전거 제작회사)에 쉽게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회사가 퀘벡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실직자가 되었다. 운 좋게도 곧 자동차 부품 만드는 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밤낮 3교대 근무를 해야 했다. 밤엔 틈나는 대로 지렁이잡이도 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낯선 땅에 뿌리내리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또 해고라는 쓴 잔을 마시게 되었다. 이미 이민 선배들은 자영업에 눈을 떠 가게를 하고 있었으나 본국에서 교육공무원이었던 나는 장사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담배나 빵 우유만 팔아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과는 달리 막상 장사를 시작하고 보니 하루 16∼18시간, 1년 내내 아내와 함께 참으로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비즈니스인 가게 운영 30여년. 그간 강도와 맞닥트려 싸우기도 했고 과로로 힘든 세월이었으나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며 커가는 모습은 우리들의 보람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간 참으로 잘도 버티며 또순이 같이 일해왔던 아내다. 우리 가정의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가게 문은 닫을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빚은 늘어갔고 결국 파산선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비즈니스를 움켜쥐겠다고 욕심을 부려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멀쩡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어 버리니 당황스럽고 허탈한 마음 가눌 수가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몸이 으스러질 지경까지 뛰며 살아왔던가. 안간힘을 쓰는 아내의 모습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가엾기 그지없었다. 발병 6개월이 지나니 집도 절도 없이 길에 나앉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무렵 다행히도 장애인 노인아파트가 나와 눈 비는 피하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아내는 울음으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만 봐도 울고 얼굴만 마주쳐도 서러움에 북받쳐 흑흑 울기만 했다.

 

 이때 우리 앞에 다가온 희망의 끈은 ‘성인장애인공동체’였다. 주위분들의 염려와 보살핌으로 조금씩 마음의 평정을 찾는 듯싶었다. 정기적으로 여러가지 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한데 어울려 애환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면서 생기는 소속감은 나나 아내에게 큰 위로와 살아갈 힘을 주었다.

 

 프로그램의 연장선에서 진행되는 야외활동은 건강했을 때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나 다름없다. 봄, 가을 소풍과 장애인 여름캠프가 그렇다. 특히 여름캠프 때는 장애인 일대일 전담 도우미가 있어 가족들을 캠프기간 만이라도 해방해주는 배려와 사랑에 나도 모르는 사이 코끝이 찡해 오면서 감동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해마다 열리는 모금행사 또는 창립기념 행사엔 우리 손으로 무대를 꾸미고 봉사자들은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손님들께 대접하는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2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동체활동은 날이 갈수록 우리 동포사회의 따듯한 관심과 도움으로 우리 같은 수혜자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있으니 그지없이 고맙기만 하다.

 

 우리가 공동체 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내 아내는 박정애 중의사님으로부터 꾸준히 침술치료를 받고 있다. 따뜻한 공동체 가족들의 사랑과 보살핌은 내 아내가 웃음을 되찾게 해주었다. 그림 그리기, 하모니카, 스마트폰, ESL 클래스, 상담, 난타 그리고 연극 등 다양한 프로그램은 우리들의 취미생활과 내적 치유에 기여하고 있다.

 

 무엇보다 즐거운 시간은 애찬을 나누는 점심시간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내는 ‘장금이 봉사팀’ 5, 6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식탁 준비를 하는 많은 봉사자, 이 분들은 곧 장애인과 가족 모든 운영팀들을 한데 묶어주는 일등 공신이란 생각을 한다.

 

 정기적인 ‘파크 골프’와 야외활동은 장애인이나 가족이나 우리 모두 함께 즐길 수 있어 빠트릴 수 없는 귀중한 생활스포츠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준다. 아직도 장애를 입은 몸으로 혼자 고민하고 집안에 갇혀 있는 개인이나 가족이 있다면 우리와 함께 어울려 보지 않겠느냐고 권하고 싶다. “용기를 내십시오. 힘든 일을 함께 나누면 가벼워지지 않겠습니까?”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보장할 수 없는 예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장애로 북받치는 설움을 참고 마음대로 울 수도 없었던 내가 이제는 웃으며 살아가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성인장애인공동체 덕분이라면 누가 믿어 주시려나?

 

 “게 누구 없소. 울다가 웃고 사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 않겠소?”

 이제는 울기보다는 행복한 마음으로 오늘도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간다. 공동체 입학한 지 10여 년이 된 이 사나이의 넋두리를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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