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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억, 고달픈 기억

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

이대식(회원)

 

 나는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셨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모태 신앙인인 셈이다. 어머니가 나를 낳으실 때 뱃속에서 머리부터 나와야 하는데 다리부터 먼저 나왔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가 약간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뇌성마비 증상도 나타났다. 그 당시에는 걷지도 못하고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하고 어머니와 바닷가에 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비디오카메라로 내가 걷는 것을 촬영하셨다. 내가 걸을 때는 두 까치발로 걸어서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그 후 아버지는 내 뒤꿈치에 아킬레스건 수술을 하면 두 까치발을 뜬 것이 땅에 닿을 거라고 하셨고, 2년이 지난 후 3살이 되었을 때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두 뒤꿈치의 아킬레스건 수술을 했다. 이런 일로 초등학교는 1년 늦은 9살이 되어서야 다닐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애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힘이 있었다면 놀리는 얘들을 때려주고 싶었다. 심지어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밀어서 앞으로 넘어지면서 이가 전부 다 부러진 적도 있다. 공부는 열심히 한 편이었다. 언어장애가 있어서 복지관에서 언어치료도 받았고 말은 지금과 같이 더듬거렸다. 초등학교 시절은 좋은 여자 짝꿍을 만난 5학년 때를 빼고 항상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 고달팠다. 5학년 때 만난 짝꿍은 다른 애들과 달랐다. 그 짝꿍은 ‘대식이를 더 괴롭히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일 이후로 짝꿍 덕분에 5학년 시절은 고마운 일도 많았고, 왕따를 더 당하지 않았다. 짝꿍하고 서로 장난도 많이 치고 즐겁게 지내곤 했다.


 백팀하고 청팀하고 나눠서 하는 운동회가 다가왔다. 짝꿍은 내 옆에 앉아 있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리기, 이어달리기, 공굴리기 등등을 하며 즐겁게 지냈다. 그 짝꿍이랑 6학년까지 같이 가고 싶었었는데 그게 안 되었다. 6학년이 되니 전쟁 같은 왕따는 또다시 시작되었다. 고달픈 시간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은 또다시 안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2001년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서야 왕따는 끝이 났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5년 동안 내 인생은 너무도 고달팠었다. 이어서 서울 중랑구 중화동에 있는 장안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특수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반 학교 안에 있는 특수반에 다녔다. 이때는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장애인 반 선생님도 좋은 분이었다. 공부도 잘 따라갔던 편이다. 친구들, 선생님과 좋은 시간을 많이 가졌다. 쉬는 시간에 물장난도 많이 하고 선생님과도 장난을 쳤다. 길지는 않았지만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 짧은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친구들과 선생님께 작별 인사를 하게 되었다. 가족이 캐나다에 이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뒤로 하고 드디어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7월 9일에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캐나다에 도착한 것이 즐거웠고 꿈만 같았다. 그동안 캐나다에 오기 위해서 한국에서 영어 과외도 받았었다. 우리 가족은 옥빌이란 도시에 정착했다. 형은 2000년도에 먼저 와 있었다. 부모님은 투자이민으로 오셔서 컨비니언스 가게를 하셨다. 나는 미시사가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ESL반에 들어갔는데 한국 학생들도 많았다, ESL 과정을 마치고 프라이빗 스쿨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웠다. 선생님,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학교를 마치고 미시사가에 있는 카톨릭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 수가 2,000명이 넘는 학교였다. 처음에는 일반학급에 있었고 나중에 PIPS(Personal Investigation Processing System) 클래스에 다녔다. 그 교실에는 장애가 있는 애들도 있었다. 학교생활에 익숙해지자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고 나는 인기가 무척 많았다. 젤러스에 가서 코업일도 하고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 나는 필리핀 출신 여자 친구가 있었다. 서로 같이 000도 가고, 즐겁게 지냈지만, 고등학교 때만 사귀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느덧 2008년이 되어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 한국에 다시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좀 더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한국에서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머물렀다. 나는 경기도 광주 지원리에 있는 삼육재활원이라는 장애인 기술고등학교에 다녔다. 토요일에는 그 학교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예배가 끝나면 서울로 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할아버지가 서예로 한문 쓰시는 것도 보았다. 교회에서는 유초등부 교사 및 파워포인트 일을 맡게 되었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고 내가 맡은 파워포인트 일도 열심히 하였다. 또래 친구도 사귀었다.


 2010년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친척들과 부모님 모두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도 곁에 계셨던 할아버지이셨는데, 이제는 영영 작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고 너무도 슬펐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나는 삼육재활원에 2학년으로 들어가서 3학년에 졸업했다.


 그후 학교 안에 있는 작업소에 들어갔다. 거기서 납땜질을 4~5개월 동안 배웠다. 납땜질하기 위해서 이력서도 냈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급여가 30만 원으로 너무 적어 그만두었다. 다음에는 기술학교에 가서 Auto CAD(자동전산설계)를 2달 정도 배웠는데 재미있었다. 그런데 나한테 지급된 재료비를 자꾸 잃어버려 선생님이 그만두라고 해서 아쉽게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나는 할머니, 삼촌,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하고 어머니와 함께 비행기 타고 캐나다로 다시 왔다. 영주권만 받은 상태에서 한국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영주권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버렸다. 형이 이민국에 설명을 잘해서 2012년도에 무사히 영주권은 연장되었다. 다시 캐나다로 돌아온 나는 성인들이 다니는 링크 스쿨에 들어가서 영어도 배우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꾸준히 배우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7개월 정도 다녔다. 장애인에게 P training이라고 15세부터 30세까지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성인장애인공동체에는 백민준 형을 통해 나가기 시작했다. 공동체에 와보니 매주 아침체조도 하고 맛있는 점심도 먹고 소그룹 활동도 했다. 많은 것을 배워서 좋았다. 매주 목요일마다 파크골프도 참가하고 있다. 파크골프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더 잘 치게 되어 흥미롭다. 나는 그날이 항상 기다려진다. 그런데 요즘 나는 서른 살이 넘어서도 돈이 없으니까 너무 힘들다. ODSP 잔액도 형이 다 관리하고 나에게 용돈은 매달 200불만 주니까 너무 모자란다. 만약 내가 일을 한다면 컴퓨터로 하는 일과 같이 앉아서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실제 본 것은 아니지만 Yonge & Finch에서 Yonge & Sheppard까지 와이드 밴으로 여자들만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여자들이 싫어서 여자들만 공격한 거라고 했다. 거기서 내가 다니던 A교회 장로님 손녀딸도 변을 당했다. 한국 사람이 하는 포장마차에서 일하던 중 사고를 당한 것이다. 내 핸드폰에 그녀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나이가 95년생인데 짧은 생을 살다 간 것이다. 나는 끔찍한 이런 사건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내 친구 또래가 아파트 9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나는 그 친구의 장례식장에 갔고 화장터에도 갔다. 그 친구와 나는 캐나다데이 때마다 기념식도 같이 갔고, 친구는 나에게 돈가스도 사주었다. 내 친구가 세상을 떠나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2명이나 작년에 죽었다. 안타깝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사건이다.

 

 2019년 2월 9일에 나는 캐나다 시민권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이다. 3월 22일에는 미시사가에서 선서를 하고 시민권 증서를 받았다. 이것은 나에게 큰 사건이었다. 형이 아니었으면 시민권은 못받았을 것이다. 형이 “시민권 시험 떨어지면 한국에 가야 한다”고 했다. 또 떨어지면 몇 달 걸리기 때문에 영주권 유효기간도 1달도 안 남는다고 그랬다. 결과적으로 형의 충고와 조언이 나를 긴장시켰고 열심히 준비했다. 나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꼭 합격해서 캐나다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어진 30분간 열심히 풀어서 75%를 획득했다. 캐나다 시민 수료증을 받고 정식으로 캐나다인이 된 지금 나는 너무도 행복하다.


(*이 원고는 구술생애사 작가 김동환님께서 성인장애인공동체 이대식 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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