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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27)-1812년 전쟁 전후(17)

 

(지난 호에 이어)

쿡스 밀스 전투(1814년 10월 19일)

10월 17일 브라운 소장이 이이리요새 전투에서 영군을 퇴각시킨 후 이자드 소장은 브라운 소장과 함께 드러먼드 영군을 추격하지 않고 대니얼 준장의 1,200명 미군이 쿡스 밀스를 공격하게 하였다.

쿡스 밀스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서남쪽으로 18KM 웰란드에서 동쪽으로 6KM 떨어진 영군의 곡식 저장소였다. 미군의 공격소식을 접한 드러먼드 소장은 750명의 영군을 이끄는 크리스토퍼 마이어스 중령이 미군과 대적하게 하였다.

10월 19일 아침 마이어스는 로켓포를 포함한 강력한 포사격으로 미군을 유인하려 했으나 미군은 숲속에서 영 보병대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숫자적으로 열세인 마이어스는 라이언스 크릭으로 퇴각하였고 미군은 영군의 중요한 식량인 밀가루와 곡식을 불태우고 다음날 블랙크릭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로 미군은 12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67명의 희생자를, 영군은 1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36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쿡스 밀스는 1921년 캐나다 국립역사지역으로 선정되고 전투기념비를 세웠다.

 

맬캄스 밀스 전투(1814년 11월 6일)

1814년 10월 던캔 매카서 준장의 700명의 기마대는 디트로이트를 떠나 쫓기는 드러먼드 영군을 추격하는 이자드의 미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영군에게 밀가루보급을 하는 테임스계곡 지역을 습격하였다. 이에 따라 애덤 뮤어 영군소령은 캐나다 의용군 400명을 소집하여 조세프 라이어슨 중령과 합세하여 수비작전에 들어갔다.

11월 5일 매카서는 바포드를 지나 브랜트로 향하는 그랜드강변에 야영을 하였다. 밤중에 이자드가 이이리 요새를 파괴하고 미국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카서는 맬캄스 밀스를 습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맬캄스 밀스는 온태리오 호수를 장악한 영 해군을 위한 중요한 밀가루 공급지역이었다.

11월 6일 매카서는 맬캄스 밀스를 방어하는 라이어슨의 550명 캐나다 민병을 대적하게 되었다.

매카서는 고지를 차지한 캐나다 민병의 정면을 기마병으로 공격을 하여 라이어슨의 주의를 중앙으로 집중시키게 유도하며 기마병 일부를 보병으로 만들어 숨소리를 죽이며 라이어슨 캐나다민병의 양쪽을 포위하였다.

놀란 캐나다 민병들은 낮은 지대로 쫓기며 숫자적으로 열세에 몰려 전장에서 뿔뿔이 흩어지며 퇴각하였다. 매카서 미군은 맽컴스 밀스 지역의 제분소와 곡식창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미군은 계속 캐나다 민병을 추격하여 도우버와 새바린에 있는 제분소도 모두 불태워 영군의 식량보급을 차단시켰다. 임무를 마친 매카서 미군은 승리감을 자축하며 200마일 떨어진 샌드위치(현 윈저)를 통하여 디트로이트로 돌아왔다.

멜컴스 밀스 전투는 1812년 전쟁에서 캐나다를 침략한 미군의 마지막 전투로 역사에 기록되었고 8월부터 담판이 시작된 겐트평화조약을 12월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미 군사력이 대영제국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다는 미국의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담판 중의 전투는 영토확장보다 담판조건을 유리하게 하는 목적이었다. 이 전투들을 통하여 신생국 미국은 강국의 발판을 만들어 유럽제국에게도 알려졌다.

이 전투로 미군은 1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7명의 희생자를, 캐나다군은 18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60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온타리오 서남부 오클랜드에 가면 맬캄스 밀스 전투기념비와 전투장을 볼 수 있다.

 

메인주에서 뉴욕주까지 캐나다

1812년부터 1814년까지 미국의 캐나다 침략으로 20회 이상의 전투에서 미국은 퀘벡 캐나다를 포기하고 전전긍긍하다 1814년 후반부터 온타리오주 전투에서 반전을 계속하였다.

1814년 8월 겐트 평화조약 담판이 시작할 때 뉴욕 플라츠버그 요새 전투를 지원하는 샴플레인호수 해전에서 28세의 맥다노 미 해군대위는 탁월한 해군전투력으로 36세의 다우니 영 해군대위를 항복시켜 이를 관망하던 프레이보우스트 영 총사령관은 전투력이 강한 영 지휘관들의 공격조언을 따르지 않고 영군의 후퇴를 명령하였다.

만약 프레이보우스트가 전투력이 강한 영 정규군을 지휘하여 플라츠버그 요새를 함락시켰다면 메인주 남쪽에서 뉴욕주까지 캐나다국토가 되었을 것이라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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