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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21)-1812년 전쟁 전후(11)

 

(지난 호에 이어)

퀘벡 침공을 포기한 후 미군은 12월 10일 뉴아크(현 나이애가라 온 더 레이크) 를 불태워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들은 강추위에 집을 잃게 되어 주민들로부터 잔인함의 원성을 샀고, 영국군은 1813년 12월 19일 나이아가라 강과 온타리오 호수 중간을 차지한 나이애가라 요새를 공격하여 미군을 쫓아내는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나폴레온 패배로 인한 미국전략

1814년 봄 나폴레온의 패배로 영국이 유럽대륙전쟁의 영국병력을 캐나다로 이동시킬 것을 예견한 매디슨 대통령은 영군이 캐나다에 도착하기 전에 온타리오주 캐나다를 점령하여 영국과의 평화회담을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어가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암스트롱 미 국방장관은 뉴욕주 플래츠버그와 버팔로우에 미 정규군훈련소를 세우고 조오지 이자드 준장과 윈필드 스캇 준장을 각각 훈련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스캇 버팔로우 훈련소장은 프랑스혁명군 훈련지침서에 의한 강행훈련을 하루에 10시간씩 실시하고, 낙오자나 정치력으로 들어온 무능하고 군인정신이 약한 장교들을 고향으로 보내 정예군 양성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미군과 영군의 대치

암스트롱은 제이컵 브라운 소장을 임명하여 영군의 집결지로 알려진 온타리오주 킹스턴을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브라운은 영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의용군을 포함한 미군 일부는 나이아가라 강변지역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실제로 킹스턴을 공격하려면 찬시 미 해군사령관의 함포사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찬시는 7월 중순 전투함을 건조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하여 브라운은 나이아가라 강 지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이리호수 요새를 영군으로부터 쉽게 탈취하고 7월 3일 강변에 집결하였다.

정규훈련을 마친 미군의 총 병력은 이로코이 원주민전사 600명, 미 의용군 750명을 포함하여 3,500명 이상이 되었다.

한편 퀘벡 침공에 실패한 미군을 오합지졸로 본 피니스 라이얼 영군 소장은 브라운의 미 정규군을 경시하여 2,000명이면 미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미군과 대치하였다. 그는 이리호수 요새도 영군이 수비하는 줄 알고 있었다.

 

치프와 전투(1814년 7월 5일)

7월 5일 라이얼 캐나다 민병과 원주민 전사를 포함한 영군 선발대는 치프와강을 건너 아침식사 중인 미군부대를 급습하였다. 브라운은 길을 닦으며 일단 후퇴를 명령하고 질서정연하게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스캇 미 포병대는 진군하는 영군에 포격을 가하고 이에 맞선 라이얼의 영 포병대는 미 포격에 대부분 박살나고 말았다. 스캇 사단은 좌우중앙으로 질서정연한 전투태세로 우측의 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영군과 전투에 맞섰다.

청색 미 군복을 보급받지 못해 회색군복을 입은 미 정규군을 훈련 받지 못한 민병으로 착각한 라이얼은 영 포병대의 포격으로 후퇴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포격에도 흩어지지 않고 공격태세를 늦추지 않는 미군에 당황했다.

혼란에 빠진 영군은 대열이 흩어지고 고르지 못한 전투지역에서 일렬종대로 진격하는 영 선발대는 미군과 근접하여 영 포병대는 포격을 멈추어야 했고 라이알의 일렬횡대는 미군의 포격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미 포병대의 산탄포는 영군을 계속 쓰러트렸다. 스캇은 U자 행렬로 영군을 포위하여 25분간 치열한 육박전에 들어갔다. 외투에 총격을 받은 라이알은 영군의 엄호 포격 하에 후퇴를 명령하였다.

스캇은 경적필패로 쫓기는 라이얼 영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이로코이 전사만 영군을 치프와까지 추격하였다.

실제로 이 전투에 참전한 2,100명의 미군은 60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328명 희생자를 내었고, 2,000여명의 영군은 108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518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독립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 정규군이 영 정규군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미 정규군의 위상이 영국은 물론 유럽대륙에 알려졌다.

이 전투지역은 온타리오주 치프와에 캐나다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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