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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6)-1812년 전쟁 전후(6)

 

(지난 호에 이어)

초토화된 요오크(토론토)

쉬프는 캐나다 의병 장교들에게 사후처리를 맡기고 요오크 요새에 영국기를 걸고 후퇴하는 기만술을 써서 파이크의 요새 진입을 주저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후퇴하는 시간을 얻은 쉬프는 영 정규군을 인솔하여 킹스턴으로 향했다.

1813년4월 27일 오후 미군이 퍼붓는 포탄이 영국군이 돌로 건축한 화약고를 터트려 파편에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다.

쉬프의 후퇴로 미군이 승리했지만 미군은 32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반면에 영군은 300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3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군이 후퇴하고 무기력해진 캐나다 요오크 의용군본부는 오타리오주 검찰청장을 맡은 잔 라빈슨 대위에게 캐나다군의 항복문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겼다.

항복문서가 수락되는 시기인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미군은 의사당건물과 정부청사를 비롯하여 정부관저 도서관 등을 불태웠다. 많은 장서를 포함하여 정착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귀중한 인쇄기를 포함하여 집과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그 당시 온주 인구는 77,000명으로 퀘벡주 인구의 5분의 1이 조금 안되었다.

쉬프가 후퇴직전 건조 중인 군함을 비롯하여 저장된 군수물자를 태워버렸기 때문에 이에 화가 난 미군 병사들은 5월 8일 나이아가라를 향해 떠날 때까지 막사를 제외하고 모든 건물을 방화로 초토화시켰다.

파이크는 미군의 약탈을 군법으로 처리한다고 전투 전 경고했지만, 그의 전사 후 군 지휘를 맡은 디어본은 약탈을 묵인하였다.

요오크를 떠난 미군은 7월21일 식량보급을 약탈하기 위해 두 번째 요오크를 점령하였고, 1814년 8월 6일 영 해군과의 해전으로 세 번째 요오크를 침공하였다.

요오크를 점령했어도 미군의 잔인성을 목격한 캐나다 정착인들은 미국의 한 주가 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아 요오크 전투로 인해 미국은 이득보다 군사적 손실이 더 컸다.

 

멕스 요새 포위작전(1813년 4월28일-5월 9일)

윈체스터가 이끄는 미군이 프렌치 타운 전투에서 영군과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원주민 전사들에게 학살당한 소식을 들은 해리슨 미 서북부 사령관은 1813년 2월 디트로이트 진군을 멈추고 의용군 4,000여명을 동원하여 디트로이트 서남쪽으로 114 KM 떨어진 오하이오주 멕스 요새(현 패리스버그)를 젖은 진흙으로 두껍게 쌓아 올린 호를 파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디트로이트 재탈환을 준비하고 영군과 원주민 전사의 연합군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를 감지한 테컴서는 원주민 전사 1,200명과 프락터가 이끄는 1,000여명의 영군과 연합이 되어 4월 28일 멕스 요새를 포위하였다. 프락터는 포문을 열고 수천 발의 포탄을 요새로 날렸지만, 젖은 진흙으로 쌓아 올린 벽에 부딪쳐 요새는 파괴되지 않았고 미군의 인명피해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원주민 전사들이 난공불락의 멕스 요새 공격을 포기하고 전장을 떠났다.

일부 미군은 영군의 포병부대를 습격하기 위해 요새를 빠져 나왔다가 테컴서의 유인으로 요새 밖 숲 속 깊이 들어가 잠복한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원주민보다 영군의 포로가 되기를 원했지만 프락터는 포로들이 원주민의 손도끼에 학살당하고 특히 마이에미 요새에서 사살당한 미군의 두피를 벗기는 것을 방관하여 테컴서는 타 원주민의 미군 학살을 중지시키고 프락터를 질책하였다. 둘은 전략적인 의견충돌이 잦아 사이가 벌어졌다.

해리슨을 돕기 위해 켄터키주를 비롯한 여러 주에서 미 의용군이 계속 증강하자 테컴서와 프락터는 5월 8일 멕스 요새 포위를 포기하고 일단 퇴군했다가 7월 재공격을 시도 했지만, 해리슨의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고 60명이 지키는 근처의 스티븐슨 미군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증강되는 미군의 반격에 의해 퇴군을 하여 디트로이트를 통해 캐나다로 돌아갔다.

수비에 성공한 해리슨은 점점 불어나는 미 의용군을 지휘하여 공격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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