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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5)-미 독립전쟁 전후(5)

 

(지난 호에 이어)

벤자민 프랭클린의 설득 실패

1776년 4월 초 아놀드는 몬트리얼의 우스터와 교체되었다. 4월 말 우스터는 토마스와 교체되어 토마스가 퀘벡 공격지휘를 맡았다. 한편 미 상원은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하여 4명의 설득력 있는 협상위원회를 퀘벡에 파견하였다.

4월 29일 몬트리얼에 도착한 프랭클린은 퀘벡 주민이 품고 있는 미국에 대한 반감내지 혐오감을 직감하면서 퀘벡 대표자들에게 미 연합 14번째 주로 되기를 권고했다.

그러나 우스터가 지불한 미 연합정부의 지폐를 바꾸어줄 금화를 요구하자 설득의 달인으로 알려진 프랭클린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245년이 지난 현재 미국이 무한적으로 찍어내는 달러 종이돈을 전 세계가 보유한다. 또한 금보다 미 달러를 더 선호한다. 이유는 아직까지 미국 경제력가치를 대체할만한 국가나 귀금속이 없기 때문이다.

 

미군의 집결

토마스의 요청으로 워싱턴은 윌리엄 탐슨과 잔 설리벤 장성들이 이끄는 10개의 연대가 퀘벡에 파병되어 6월초에 계속 도착하였다. 총 1만 명이 되지만 근무계약이 끝나는 민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천연두로 속속 사망자가 속출하여 정확한 미군 숫자를 가늠하기 힘들어 전투할 수 있는 미군은 우스터가 몬트리얼에서 이동한 군과 합쳐 3천에서 6천으로 추산되고 있다.

 

영국의 파병

영국은 2월 칼튼의 요청에 의해 잔 버고인 소장이 이끄는 독일의 헤씨안외인부대와 영국의 정규군 총 11,000명의 파병선두가 5월 2일 세인트 로렌스 강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파병도착 소식을 들은 칼튼은 시험 삼아 약 800명의 군사로 전의를 잃은 미군을 공격하였다. 의외롭게도 쉽게 미군을 격퇴할 수 있었으나 소심한 칼튼은 추적을 멈추고 영국군을 기다렸다.

5월 6일 3천 명의 엉국군과 보급이 퀘벡에 도착하였고, 6월 1일 버고인이 7천여 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퀘벡에 도착하였다.

 

미군의 후퇴

집결하는 미군을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지휘를 하던 토마스는 6월 2일 천연두로 사망하여 탐슨이 지휘를 맡았다. 탐슨은 2천 명의 미군을 이끌고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완패를 하고 자신은 포로가 되어 설리벤이 미군 지휘를 넘겨 받았다.

설리벤은 몬트리얼의 아놀드와 합세하여 칼튼이 몬트리얼로 공격하고 버고인은 퀘벡에서 미국으로 후퇴하는 미군을 추격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몬트리얼을 민병에 맡기고 남쪽으로 후퇴를 했다.

6월 17일 몬트리얼에 도착한 칼튼은 설리벤 군을 가볍게 퇴각시켰다. 아놀드는 버고인 영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몬트리얼 외각에서 버티다가 강가의 배를 불로 태우고 후퇴를 하여 영국군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칼튼은 3개월간 선박을 제조하여 영군을 이끌고 미군을 계속 격파하여 11월 2일 아놀드는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이 고수하는 티콘드리아 요새까지 후퇴하였다. 워싱턴은 퀘벡을 재공격하자는 상원의 표결을 반대하여 미국의 캐나다 침략 전쟁은 일단 후퇴로 끝났다.

그러나 버고인은 캐나다에서 남침을 계속하고 온타리오에서 동쪽으로 배리 센 러제이가 이끄는 영국군과 뉴욕 서북으로 공격하는 헨리 클린턴군과 알바니에서 협공을 하여 미군을 남북으로 갈라놓는 작전을 세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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