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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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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60)-유럽에서 소 아시아로

 

밧모 섬에서 점심 후 12시에 예약된 배에 승선하였습니다. 아담한 사이즈의 정원이 약 150명 정도 되는 배이건만 터키 땅 “쿠사다시(Ku?adası)”로 가는 사람은 우리뿐 이어서인지 결국 우리들이 전세를 낸 형국이 되었습니다.

밧모 섬이 “터키 땅에서는 불과 60km밖에 안 떨어져 있다”고 하기에 한두 시간이면 가려니 하였던 뱃길이 우리의 목적지 “쿠사다시”까지는 장장 4시간 반 이랍니다. 하기야 그 옛날 사도 바울은 이 길을 얼마나 오래 걸려서 다녔던고….

이 배의 정원이 150명 정도라니 아마도 바울이 타고 가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난파당한 배보다는 많이 작은 배입니다. 그 때에는 276명을 태운 커다란 목선이었지만 오늘은 훨씬 작은 철선으로 바다는 바로 그 바다인데….하늘이 맑으니 “유라굴로”가 올 일이야 없겠지요.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잔잔한 바다위로 저 배는 떠나가니….” 하는 노래대로 참으로 순탄하고 아름다운 뱃길이었습니다. 왼쪽으로는 가까이 떠있는 섬들, 오른쪽으로는 점점이 멀리 떠있는 섬들이 있어 수면은 잔잔하고 정오의 맑은 햇빛은 찬란하였습니다.

기온은 그저 얇은 재킷을 입고 있으면 딱 좋은 정도였고요. 모두들 갑판에 나와서 바다를 바라보면 담소하다가 2시간 정도가 지나자, 보이는 것은 수평선 뿐이요 파도가 조금씩 심해지자 하나 둘 아래 선실로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얼마나 고대하던 지중해의 뱃길인데…. 낮잠을 잘 수야 없었지요.

시원한 바닷바람을 받으며 하얗게 부서지는, 까만 색에 가까운 지중해의 물보라, 그리고 그 물보라에 피어나는 작은 무지개!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아름다운 정경에 몰입되며 “운이 좋으면 돌고래도 볼 수 있을 것” 이라고 언제인가 본 사진을 떠올리고 있던 중, 갑자기 뱃전에 뛰어오르는 돌고래 두 마리가 저를 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물 속으로 사라졌다가는 다시 뛰어오르며 손짓을 하고….소 아시아를 찾아가는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돌고래였나 봅니다.

소 아시아(Asia Minor)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AD 73년에 성전이 파괴되고도 또 60여 년이 지났으나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었습니다.

AD 132년,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하여 로마에 대한 2차 (어떤 학자들은 3차라고도 합니다.) 반란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AD 135년, 베타르(Betar) 요새에서 최후의 방어가 무너지며 유대인의 마을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라는 새 이름으로 불려지며 유대인 거주가 금지되고, 오직 성전 파괴일(아브월 9일)에만 방문이 허락되었지요. 이 때의 하드리안 황제는 지금까지 유다로 부르던 속국의 이름을 “시리아–팔레스티나”로 바꾸었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지요. 이후로 이 땅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로마인들의 바람대로 더 이상 유대인들의 반란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시기에 유대지방을 포함하여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지역에 아시아 속주가 설치되면서 전체를 아시아라고 불렀으나, 아시아가 동쪽으로 엄청 크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지역을 “소 아시아”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소(小)아시아(Asia Minor)로 부르던 대부분의 지역인 아나톨리아(Anatolia)는 오늘날의 터키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나톨리아는 “해 뜨는 곳”이란 의미로 그들에게는 동쪽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소 아시아는 종교적으로도 자주 언급되는 지역으로, 아브라함이 야훼의 명령을 받기 전에 살던 땅은 이곳의 동남부에 위치한 “하란”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그랄의 군주인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자신의 아내 사라에게 반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라를 자신의 누이로 속이고 결혼에 동의했지요. 야훼는 사라와 결혼하려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그 결혼을 막으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불평하며 배상금을 주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20장)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18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도록 가나안의 열 두 아들 중 둘째 부족에 속하는 헷(Heth 창 10:15)의 후손들이 오랫동안 “히타이트 제국”을 이루며 번성하였던 지역이었습니다.

다윗의 심복이었던 “우리아”도 히타이트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출세한 군인이었고, 그가 다윗의 명에 의하여 죽게 된 곳 역시 지금의 요르단 수도 암만에 있었던 고대 성에서의 싸움에서 였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요한 계시록에 명시된 일곱 교회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로마 시대에는 박해를 피해 이 곳까지 온 그리스도교인들이 많았던 곳이었기에 지금 우리들이 그 흔적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지자 소 아시아는 동로마의 중심이 되었고, 구심점은 콘스탄티노플이 되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비잔티움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도시로 바꾸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11세기에 등장한 투르크인들이 동로마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면서 오늘날의 이름인 이스탄불로 바꾸었습니다.

이후 소 아시아 전역은 이슬람의 땅이 되었고,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하여 이 곳으로 까지 오며 신앙을 지켰던 기독교는 이슬람교에 눌리며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투르크인은 터키민족의 뿌리입니다. 원래 이들은 돌궐인(突厥人)으로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 살던 유목민이었습니다. 원 뿌리는 우리 민족과 같은 '몽고-퉁구스(Mongol-Tungus)' 계통이라고 보는데, 유목민족이라 여기저기 이동을 하다가 멀리 유럽 쪽으로 진출하여, 옛날 “트로이 제국(Troy)”의 땅이었으며,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던 소 아시아, 즉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까지 진출하여 “동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발칸(Balkan)반도” 대부분을 차지하여 마침내 “오스만(Osman) 터키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오랜 동안 아랍권 전체를 통치하며, 멀리 북 아프리카의 튀니스(Tunisie)까지 지배하는 등 “알렉산더(Alexander)제국” 이래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영역을 근세까지 지배하였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터키(Turkey)와 우리나라는 오랜 형제지국(兄弟之國)이라고 많은 터키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발원지이기도 하지만 중부 고원지대는 나무가 없고, 바위투성이의 땅에 기후마저 혹독해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해를 피해가던 기독교인들이 이 불모의 땅에 숨어들어 동굴을 파고 절벽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카파도키아의 계곡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터키 땅에 들어가려니 미국에서 오신 이 목사님 내외는 한 사람당 입국비자가 미화 $20인데, 캐나다에서 온 우리는 한 사람당 $60이랍니다. 그러면서 만약 우리가 한국 여권을 가졌다면 돈을 안내도 된다고 합니다. 역시 형제지국의 사랑인가 봅니다.

해 돋는 나라, 한국에서 태어나 Canada로 이주하여 살던 우리 일행들은 “해가 뜨는 곳”이라는 아나톨리아에 해가 지는 저녁 녘에야 배에서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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