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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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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28)-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

 

마태복음에 의하면 광야 시험 후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북쪽 호반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며 천국을 전파하시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4 복음서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사역하신 예수님의 공생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서로 매우 흡사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중, 세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통적인 관점으로 함께 보다" 라는 뜻으로 synoptic, 즉 "공관(共觀) 복음서"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들과 가르치심 들의 순서나 지역들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었고, 또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의 12제자들에 들어가지도 않았기에 “공관복음서 문제”라는 화두가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Q문서”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나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제가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일들을 적어 나감에 있어 그 순서가 좀 바뀌어 졌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갈릴리 호수 북서부 해안으로, 가버나움과 게네사렛 사이에 위치한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신, 상당히 긴 수훈이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7장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되어 있지만 “산” 이라기 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갈릴리 물가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이 일을 기념하는 “팔복교회”가 이 언덕 위에 있습니다.

4세기경 비잔틴 제국에서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이 곳을 다녀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던 자리에 1936년, 프란체스코 수녀회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를루치(Antonio Barluzzi)가 설계하여 1938년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밝고 깨끗한 인상을 주는 교회 내부는 여덟 가지 복을 상징하는 팔각형 구조로 되어있으며, 여덟 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팔 복의 내용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계자 안토니오 바를루치는 예수님이 주신 8복 말씀에 하나를 더하여 아홉 가지 복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가이드들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의 끝맺음인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는 말씀을 아홉 번째 복으로 생각한 안토니오는 팔각형 모양의 건물 중앙에 커다랗고 둥근 돔을 만들어 아홉 번째 복을 상징하였다고 말입니다. 진위는 차치하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왜 “구 복”이 아닌 “팔 복 교회”라고 하였을까요?

 

이를 위하여서는 아무래도 기독교와 성경이 어떻게 한국에 전래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복음 전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서기 635년부터 845년, 통일신라 시대에 당나라를 통해서 경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말합니다.

 

서기 1253년에는 몽고를 통해서 로마 선교사인 ‘루브루크’에 의해 고려(Core’e)시대에 카톨릭이 접촉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인 서기 1592년과 1598년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에는 일본군의 종군신부인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참전했다는 정사의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승훈(세례명; Peter)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1784년부터 1884년까지 100년 기간을 조선시대의 ‘천주교 선교세기’라고 부르고 있지요.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천주교도인 수 천명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1845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평안도 의주로 월경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그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순교를 당한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의 조선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성경으로 인하여 조선 평양에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설립되어 후에 장대현 교회로 발전하기도 하였습니다.

 

1872년에 만주지역에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인 존 로스(1841~1915)와 존 매킨타이어(1837~1905)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준비를 진행하며 존 로스 선교사는 압록강 상류 부근까지 가서 한 사람의 한인에게 한문 성경 몇 권을 전하고 돌아왔는데, 이 일로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존 로스는 1874년에 한국어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의주 출신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어, 이응찬은 존 로스의 한국어 어학선생이 되는 한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세 명의 의주 청년과 함께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번역 작업에 합류하게 되었던 역사를 보면, 우리말 성경은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산상 수훈의 복은 세어보면 분명 9개인데, 중국에서 먼저 번역되면서 중국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는 8자에 복을 더해서 “팔 복”이라고 수훈에 표제를 붙이었고, 한글 성경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직역하여 이 교회를 “팔복교회”로 부르지 않았었을까? 하는 것이 저의 엉뚱한 공상입니다.

 

아니 어쩜 제가 알 수 없는 신학적인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9번째 복을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8가지 복의 과정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힘겹게 받아야 하는, 이해하기 힘든 “복”이기도 할 터이니까요.

영어 성경에서도 산상수훈의 표제는 “Beatitude”, 즉 우리말로 “지복(至福)” 혹은 “무상의 행복”이라고만 하였습니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던 곳에서 바라본 갈릴리

 

팔복교회 외부 모습

 

내부 모습

 

돔 아래 제단

 

여덟 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쓰여진 팔 복의 내용. 왜 9번째 복은 없을까요? 알 수 없는 신학적인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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