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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소풍의 기억이다. 그때는 왜 그리도 능(陵)으로 소풍을 갔는지 모르겠다. 태릉, 서오릉, 헌인릉, 선정릉 등… 따지고 보면 능은 무덤인데, 거기서 음식 먹고 게임하고 노래 부르는 거다. 그러니 무덤에 계시는 선조들이 속이 편했을까?
 초등학교 고학년 때, 어머니는 소풍 가는 날이면 담임선생님께 드리라고 김밥을 따로 싸서 주셨는데, 나는 그것이 싫었다. 마지못해 들고는 나왔지만, 한 번도 담임선생님에게 김밥이 전달된 적은 없었다. 김밥을 갖다 드리는 것도 쑥스럽기도 했고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창피함 같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가져간 김밥은 항상 친구들 차지였다. 어머니는 눈치를 채셨는지, 중학교 2학년 인가부터는 담임선생님의 도시락을 챙기지 않으셨다.

 고등학교 2학년, 지금의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으로 소풍을 갔을 때다. 당시는 소풍 갈 때 교련복을 입고 갔는데, 도시락을 먹고 장기 자랑 시간이 되었다. 동창 중에 노래도 잘하고 끼가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의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여서 학교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친구가 몸을 흔들어대며 가수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를 불렀는데, 나는 이 노래를 거기서 처음 들었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밖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들어갈 땐 뽐을 내며 들어가더니/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뒷문으로 도망가다 붙잡히어서/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와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스워/ 애해 해해 우습다 왜 해해해 우스워/ 와하히히 우하하하 우습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반주도 없고 음향시설도 없던 시절에 ‘생목’으로 불러 젖기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손뼉치고 환호와 열광이 끊이지 않았다. 심사위원은 소풍을 같이 간 선생님 들이 보았다. 그런데 심사위원 중에 그 친구 아버지의 친구가 계셨다. 두 분은 나이도 같고 실향민, 화가, 선생이라는 동질감으로 오래 전부터 친구였고 서로 가정사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러다 보니 노래를 부른 친구를 꼬마 때부터 봐왔는데, 그가 이렇게 커버린 것이다. 그 심사위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쩟~쩟. 뭐,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하며 혀를 찼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과 눈도 마주치기도 어렵고 함부로 나대거나 까부는 것조차 엄두가 안 날 시절이다. 모두들 그 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순간, 슬로 모션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게 됐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노래를 부른 친구는 ‘아차’ 싶었던지 쏜살같이 튀어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 심사위원은 “어쩌면 즈 아버지하고 똑같냐?”라며 심사평을 해서 모두들 배꼽을 잡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가 부른 <빈대떡 신사>는 만요(漫謠), 쉽게 말해 ’코믹 송’이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대중가요를 나누면 트로트, 재즈, 신민요와 만요 이렇게 네 장르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에서 만요는 다른 가요들과는 달리 일상생활의 소소한 내용을 재밌고 익살스럽게 풍자한 이야기인 만담(漫談)에 음을 붙인 것이다. 만요가 인기 있었던 것은 억압적인 식민지 사회에서 뒤틀림과 풍자 속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가사 내용과는 달리 만요에는 현실의 슬픔을 토로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려는 비판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만요는 코믹한 노래이기에 저속하거나 유치한 가사가 항상 문제가 되었고,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이후 사회 분위기가 긴장되고 1940년대 들어 전시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만요와 같은 코믹한 만요들은 차츰 사라진다. 그 뒤, 만요는 배우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김용만의 〈회전의자〉,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 김정구의 <왕서방 연서>, 김해송의 <오빠는 풍각쟁이>, <모던 기생 점고> 등이 불리어지다가 1960년대 말부터 차츰 사라진다. 그나마 만담은 장소팔과 고춘자, 서영춘과 백금녀 등에 의해 1980년대까지 알려진다.

 <빈대떡 신사> 뿐 아니라, <모던 기생 점고> 등 만요의 가사에는 당시의 요릿집이 많이 등장한다. 지금은 대형 음식점들이 흔하지만, 당시 요릿집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궁금한 건 못 참아서 가사에 나오는 요릿집들을 찾아보았다.

 <명월관>은 역사가 꽤 깊다. 1906년 지금의 동아일보 사옥 자리에 세워진 대한제국 최초의 궁중음식 전문 요릿집이었다. 궁중요리사 출신 안순환이 개업하였고 개업 이후 1918년 흥산주식회사가 매수하였다가 다시 이종구에게 판다. 이종구는 군관학교 교장을 지낸 이규진의 아들로 원래 잡화상을 하던 사람이었다.

 <국일관>은 1921년 종로구 종로 2가 관수동에서 개업한 고급 요릿집으로 정재계 고위층이 드나들었고 해방 후, 여간첩 김수임이 이곳에 여종업원으로 잠입해 암약했던 곳이다.
 <백운장>은 인왕산 백운동 계곡이 있는 청운동에 있던 조선 전기 문신 이명의의 집터에 대한제국 법무대신을 지낸 김가진이 별서를 짓고 <백운장>이라 이름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집이었다.

 <송죽원>은 1931년 김원배가 종로구 낙원동에 개업한 요릿집이다. 객실 22개와 200명을 수용하는 연회실이 있었고, 종업원을 60명이나 두었다.

 <식도원>은 1922년 남대문에 개업한 음식점이다. 안순환은 광화문의 <명월관>을 팔고 종로로 옮겨 1918년에 <태화관>을 열었다. 이곳에서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자, 일제가 영업 정지를 시킨다. 그러자 다시, 현재의 신한은행 광교빌딩 자리로 옮겨 개업한다. 식도원의 자랑은 음식과 건물이기도 하지만, 외국에서 온 손님에게 조선의 음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알려졌다.

 <조선관>은 종로구 서린동에 있던 요릿집이고 <태서관 별장>은 한강 인도교 건너 노량진에서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용양봉저정 옆에 있던 <태서관>의 별관을 말하는데 한강 조망이 좋았다고 한다. 용양봉저정은 정조가 수원에 갈 때 노들 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건너가 잠시 쉬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본점은 서울 공평동 소재의 고경운이 운영하던 요릿집이다.

 <음벽정(飮碧亭)>은 성북동에 있던 민영환의 별장으로 그가 순국한 후 동생에게, 다시 일본인 손을 거쳐 1934년 한택수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 요정으로 변했다가 6.25 전쟁 때 불타 버렸고, 지금은 그 자리에 연화사라는 사찰이 있다.

 <남산장>은 남산 밑 장충동에 있었던 요릿집으로 이 요릿집의 건물은 원래 덕수궁에 있던 비현각이라는 건물이었는데, 고종이 승하하자 통치 자금이 부족한 정부에서 이 궁을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애 팔았고 이것을 사들여 요릿집의 별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비현각은 왕세자의 공부방 겸 사무실이었다.

 <천향원 별장>은 정릉에 있던 요릿집으로 인사동에 있던 본점 천향원의 시외 분점이다. 천향원은 기생 출신으로 명월관과 국일관에서 일했던 김옥교가 결혼 후 남편과 함께 개업한 요릿집으로 이후 호텔사업에서도 성공해 당대 최고가(현 시가 6억 정도)의 자동차를 굴려 화제가 된다. <가게츠 별장>은 일본인이 운영한 요릿집으로 1915년 충무로 2가에 본점을 개업하였고 충무로 3가에 대연회장이 있었다. 가게츠는 화월(花月)이라는 뜻으로 이 별장 건물도 덕수궁에 있던 ‘홍문관’ 건물이었다. 홍문관은 왕세자 어학문소로 조선시대 과거 집현전을 말한다.

 이런 요릿집들은 1908년에 폐지된 관기 제도의 여파로 기생들이 사회로 쏟아야 나오면서 ‘요정’이라는 음식점 문화로 발전하여 1970년 때까지 성행하였고 이런 기생들 중에는 가수나 배우로 진출한 인물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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